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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윤 Nov 18. 2021

고통적 거리두기

소년이 온다, 한강, 소설

  어느 순간부턴가 고통에 대해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신념이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는 더욱 엄격하게 거리를 둔다. 가장 근본이 되는 생각은 감히 내가 어찌 알고 저 고통에 대해 무슨 판단을 하여 뭐라 말할 수 있는가. 저 고통을 겪고 마주 보고 감당하기까지, 저 고통을 입 밖으로 표현해내기까지 당신이 어떤 길을 걸어왔을 것인지를 감히 내가 어찌 알 수 있을까. 과연 나에게 그것을 판단할 권리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나의 고통에 그러한 권리가 있는가. 더 나아가 내가 그저 안타까워한다고 당신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하지만 우린 결코 주관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개 우리를 채우는 모든 것은 개인적인 경험, 오감, 기억, 깨달음일 뿐이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으며, 참 무지하게도 누군가의 입맛대로 편집된 조각을 잠깐 보고선 함부로 전체를 판단하기도 하는 편협한 존재이기도 하다. 비슷한 고통을 어렴풋이 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헤아림의 결과나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니까.

  '당신이 뭘 안다고, 또, 나는 뭘 안다고.'

  어느 어린 날, 분명 나도 노력해본다고, 고통이란 바다에 완전히 입수하여 머리끝까지 흠뻑 적시고서는 그 속의 빛깔을 보기도 끔찍한 촉감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주관성이라는 수경을 쓰고선 말이다. 그것만이 맞는 것이라고, 올바른 인간의 상도리라고, 올바른 정답인 표현의 방식이라고 배워왔고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생각했으니까.

  가벼운 위로는 상처를 남기고, 섣부른 판단은 폄하를 남긴다. 고통에 대해 획일적으로 안타까워하는 태도와 상대를 작게 만드는 슬픈 눈썹, 같이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정해져 있는 전형적인 위로. 처음에는 불편함으로 다가왔다가 다음에는 경멸이 되었다. 그 속에 반짝거리며 언뜻언뜻 보이는 본능적인 안도감이, 은근한 우월감이, 고통의 당사자에 대한 선입견이 깔려 있는 것을 발견했고, 어디선가 소위 '아는 사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입방정을 떨어줄 안줏거리가 될 에필로그가 뻔히 보였다. 결코 틀린 것이라고,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간혹 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렇게 고통 옆에 다른 모양의 새로운 상처가 생기면 혼자 또다시 그것을 치유하는 데에 에너지를 더 쓰곤 했다. 그 상처에 약을 바르면서 불가피하게 옆에 있는 고통을 건드렸고, 그러면 잠자코 눈을 감고 있던 고통은 번쩍 눈을 뜨고 나와 눈동자를 마주하곤 했다. 몇 번을 그렇게 겪고 나니, 이것이 유일한 정답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본래 인간은 완전한 입수도 못 할뿐더러 입수 자체를 못 하니 타인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의 확신.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감은 인간에 대한 오만의 형상화가 아닐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어디에도 없다. 다들 이해하는 척은 얼추 해내겠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한 헤아림은 불가능한 것이다. 비슷한 고통, 아니 아주 같은 고통이라도 각자의 우물에 박힌 웅덩이는 다를 테니까. 누군가는 작은 웅덩이로 금방 메꾸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너무 깊은 웅덩이가 생겨 금방 메꾸지 못하고 한참을 방황할 수도 있다. 정말 '네가 힘든 것을 안다고 내가 힘든 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라는 그 누군가의 글이 깊게 음미되는 순간이다. 더욱이 고통은 뒤로 밀어 두고, 작은 방황조차 쉽게 인지할 수도 없을뿐더러 인지한다고 해도 판단의 주관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노릇이다. 역시 사람은 본인이 직접 겪어봐야 생각을 한다. 불편함을 느껴야 생각을 한다. 생각을 하니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아찔함이 느껴졌다.


  어머니의 속은 썩어있었다. 지금도 썩고 있다. 뱉는 것보다 삼키는 것이 더 편한 당신은 수없이 삼키기만 해서 속이 썩었다. 당신의 입에서 수없이 피어나는 양귀비를 뱉어 내는 대신 혼자 꼭꼭 씹어 삼켜 넘겨서 입안이, 식도가, 위가, 창자가, 그렇게 속이 썩었다. 셀 수 없는 삼킴 중에 한 번의 뱉음을 나에게 하곤 했다. 대부분 이미 힘이 빠져 툭툭 떨어지는 투덜거림이었다. 그 한 번이 왜 그렇게 싫었을까. 툭툭 떨어지는 투덜거림은 귓가에 날카로운 조각으로 박혔고, 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곤 했다. 그 당김에 못 이긴 나는 질척하게 늘어져 당신의 바다에 빠졌다. 그럼 숨이 막혔다. 흐릿한 바닷속에 비치는 빛깔과 심장이 저릿하게 느껴지는 통증은 숨쉬기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아등바등 바다에서 빠져나오면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났고 화가 났다. 온몸에 맺힌 물방울을 당신에게 도로 털어내면, 결국 남은 것은 털어낼 수도 없는 '눈물'뿐이었다. 그리고 '함부로 안쓰러웠고 안타까웠다.' 그러면 나에게서 어머니는 작아졌다.

  오만함이라는 아찔함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감히 누군가의 고통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작게 만들고 있었다. 나의 주관성으로 당신을 안타까워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당신을 알면 얼마나 알까.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한다고 얘기를 하면서 진정 나는 당신을 얼마나 안다고 감히 고통을 판단하고 있을까. 나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고 얘기하면서 나는 당신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이리도 오만하게 굴던 것일까.


  나는 고통에 대해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그것은 신념이 되었다. 감히 안타까워하고 안쓰러워하고 싶지 않다. 당신의 고통은 당신만이 알 것이며, 그 방황은, 그 우물의 웅덩이는, 그 눈물의 무게는 당신만이, 당신의 고통만이 알고 있다.

  과연 고통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가능할까. 그렇다면 그것의 결정체는 무엇일까. 이 많은 의문에 대한 그 어떠한 대답이 있을까. 정답이 아닌 대답. 고통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위해 기꺼이 그 고통 속에서 숨을 들이마신 소설. 이 소설이 나에게 대답해준다. 고통에 대한 완벽에 가까운 이해는 단지 '안타까움'만이 아니라고. 남는 것은 털어낼 수 없는 '눈물'이었고, '감각'이었다. 온 세포로 느끼는 감각. 고통에 대한 획일적인 안타까움, 슬픈 눈썹, 전형적인 위로의 대사는 어디에도 없다. 본능적인 안도감이나 은근한 우월감, 선입견 또한 없다. 입방정 떨어줄 안줏거리는 더욱 없다. 어쩌면 이것 또한 완벽한 이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인간은 주관적이고 나 또한 그 주관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의 가장 가까운 형태가 아닐까.


  굉장히 감각적인 소설이에요. 감각적이라는 게 막 센스 있다, 세련됐다 이런 뉘앙스의 감각적임이 아니고, 오감, 그리고 보이지 않는 감각에 대한 그런 감각적임을 말하는 거예요. 살갗에 그 당시의 광주의 공기가 스치는 감각, 눈길 따라 또렷하게 그려지는 그 당시의 모습에 대한 감각, 인물의 말을 따라 또박또박 마음이 따라 걷기에 오는 저릿함에 대한 감각. 현생에서 쉬는 시간에 혼자 읽다가 진짜 광광 울 뻔했습니다. 웬만해서는 우는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나 감각으로 휩싸이니 코가 찡하게 울컥하더라고요. 정말 잘 쓴다는 생각도 같이 들어서, 멋있는 작가의 글을 읽었다는 행복이 느껴졌습니다.

  아, 더하자면 저는 함부로 동정하고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이 타인에 대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더욱 근본적으로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라고 생각해요.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함부로 동정받을, 안타까워하는 소리를 들을 존재가 아니잖아요. 고통에 무너지는 것도, 고통에서 방황하는 것도, 고통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도, 고통에서 성장하는 것도, 그러나 완전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확신이 되는 순간도 모두,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는 것들이니까. 박명수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동정할 거면 차라리 돈으로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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