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26일
밤새 비가 살포시 내렸나 보다. 잔디 위에도 꽃잎 위에도 이슬처럼 촉촉한 물방울들이 내려앉았다. 오랜만에 내린 비가 주는 차분함이 이제 정말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침을 먹고, 치우고, 할머니께 드릴 꽃을 장만하고, 화병의 물을 갈고, 거실의 화초에 물을 주고, 랄라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나서야 조금은 마음에 여유가 찾아온 일요일 오전. 찬장에서 페퍼민트 잎을 꺼내 차를 우린다. 할머니께서 평소에 아껴 쓰시던 연녹색 찻잔에 향기로운 차를 담아 한 잔 내어드리고, 나는 손에 익은 머그잔에 한 잔 가득 담아 서재로 들어왔다.
슬픔 속에 평온이 있듯이, 그리움 속에도 웃음은 있다.
맛있는 거, 좋은 거, 이쁜 거 보면 할머니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러면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맛있는 거, 좋은 거, 이쁜 거를 보면 제일 먼저 나에게 내미시던 할머니의 따뜻한 손이 떠올라 미소 짓는다. 내가 좋아하는 박카스를 한 박스 사놓으신 뒤, 아기 엄마가 된 서른 넘은 손녀딸을 다용도실로 몰래 부르시더니, 여기 몰래 놔둘 테니까 언제든지 와서 마시라던 할머니의 말씀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아픔은 뼈를 녹아내리게 하지만, 내 가슴 속속히 새겨진 할머니의 사랑의 흔적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요즘 조용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나에게는 몹시 소중하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대청소도 하고, 평소에는 시간이 없어서 엄두도 못 냈던 다양한 요리도 도전해 보고, 햇살 드는 곳에서 차분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도 마음의 평온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된다. 예전보다 작은 일들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커졌고, 남편에게도 랄라에게도 더욱 너그러워진 자신을 발견한다. 무엇보다 할머니께 심한 염려를 끼칠까, 평소 몸가짐 마음가짐 하나하나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가을이 오면, 할머니께 좀 더 다양한 차를 선보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