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4일
생전 할머니께서는 “얼굴 예쁜 거 머리 똑똑한 거 다 소용없다.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그 마음가짐을 어떻게 올바로 갖느냐가 제일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남이 나보다 안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심보처럼 고약한 것은 없으니 명심하라고 이르셨다. 할머니께서는 그 사람의 됨됨이만이 오롯이 인생의 희비를 가른다고 평생 가르쳐주셨지만, 부끄럽게도 난 할머니의 깊은 뜻을 마흔이 된 이제야 그것도 아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너무도 애석한 건 나의 해석이 맞는지 틀린지에 대한 여부를 할머니께 여쭤볼 길이 없으니 더욱 막막할 뿐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내가 남에게 마음을 들여다보일 수도, 남의 마음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들여다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내 관점에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다시 한번 골똘히 생각해보면, 진정한 고운 마음이란 꼭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고 갖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내 마음속에 좋은 생각과 좋은 느낌이 깃드는 순간, 난 이미 순수한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되는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내가 내 마음과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싶다.
평소 랄라의 신발끈을 꽁꽁 묶어주면서 나는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 랄라가 이 신발을 신고 놀 때 다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친구들이랑 뛰어놀 수 있게 엄마가 아주 안전하게 묶어줄게.’ 그러나 내 마음과는 달리 그날 랄라가 뛰어놀다가 다칠 수도 있고, 친구와 다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딸아이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무사하기를 바라는 좋은 마음가짐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걸까? 그건 아니지 싶다.
또 다른 예로 나는 건조기에서 보송보송한 이불빨래가 말려져 나오면 쪼르르 이층 침실로 올라가 침대를 정돈하며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다. ‘오늘 우리 모두 좋은 향기 맡으면서 보드라운 이불속에서 예쁜 꿈 꾸고 잘 수 있게 내가 잘 정리해 줄게.’ 그렇다고 악몽이 밤새 우리 가족만을 비껴가지는 않겠지만, 좋은 마음으로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해나가다 보면 차후에 안 좋은 결과가 찾아온다 해도, 자신을 심히 원망하거나 탓하게 되는 경우의 수가 훨씬 줄어든다는 것을 이미 삶 속에서 체험하지 않았던가.
나는 요즘 작은 일을 할 때도 온전히 그 한 가지의 일에 내 마음을 다 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갖는 올바른 마음가짐이 곧 나의 됨됨이가 되고, 나아가 내 인생의 희비의 저울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인다는 이치를 할머니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손녀딸이 도리에 맞는 삶을 사는 지혜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토록 누누이 같은 당부를 하셨나 보다.
할머니의 육신이 내 곁을 떠나신 지 어느덧 삼 년이 되었지만, 할머니의 가르침은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육체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그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다. 영혼은 불생불멸하기 때문이다.”라는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할머니의 영혼의 울림은 늘 나의 가슴을 통관한다. 그러기에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표현은 단지 살아있는 인간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통의 카타르시스가 아닌, 生者와 亡者가 함께 공유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봄바람에 실려온 할머니의 온기를 느끼며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