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 글 쓰는 사람은 브런치 스토리로.
"넷플릭스 왜 보냐? 브런치 스토리 있는데."
글은 쓸 줄 알았다.
내가 글 쓸 줄은 알았다. 모를 때는 자신감 하나는 크다.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하지 않던가? 충만했다. 아니 넘쳤다. 마음에 담긴 이야기를 풀고 싶었고, 끝없는 상상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시점은 할 일이 현저히 줄어들 은퇴 뒤로 생각했다. 무대는 미정.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듯, 기회는 불현듯 왔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생각지도 못한 크기로.
브런치 스토리의 존재도 몰랐다. 호적을 함께 쓰는 친구 (a.k.a. 친동생)가 알렸다. 일련의 심사를 통해 글을 발행할 권한을 준다는 브런치 스토리. 매력적이었다. 내 글이 읽힐만한 글인지, 브런치 스토리에 맞는 사람인지 평가를 받고 싶었다. 결과는 잔인했다. 두 번의 탈락을 했고, 글쓰기 연습을 한 뒤에야 겨우 합격했다.
사람은 서울로, 말을 제주로, 글 쓰는 사람은 브런치 스토리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다섯 사람의 평균이 나다." 사업가인 짐론이 한 말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를 때는 주위를 둘러보면 된다. 그들의 모습이 나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어쩔 수 없다. 만나고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 변하고 만나는 기회가 달라진다. 옛날 분들의 말도 있다. '사람을 서울로 말은 제주로.' 환경에 따라 변화할 사람의 모습을 뜻하는 말로 읽힌다. 한 줄 더 얹히고 싶다. 글 쓰는 사람은 브런치 스토리로.
인터넷은 익명에 가려져 온갖 음해과 비난이 잦다. 댓글은 아무렇지 않게 각진 단어로 모니터 너머에 있는 사람을 찌른다. 사실관계와 무관한 이야기가 확대, 생산된다. 브런치 스토리는 다르다. 조악한 글이라도 라이킷을 누르며 응원하는 분도 있고, 글을 꼼꼼히 읽고 댓글로 소통하는 분들도 계신다. 공통점은 모두 글에 진심이다. 브런치 스토리에서 글을 쓰면, 다섯 사람의 평균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를 통해 꿈을 꿀 수 있게 여유를 주는 곳이 바로 브런치 스토리다.
넷플릭스 왜 보냐? 브런치 스토리 있는데.
대형 출판사 마케터와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가 소개한 카피가 있는데,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소설 보면 되는데."다. 배우 박정민이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를 읽으며 했던 말이다. 브런치 스토리에도 딱 맞는 카피다. "넷플릭스 왜 보냐? 브런치 스토리 있는데."
SNS는 축제만이 기록되어 있다. 일 년 동안 기다려온 해외여행이 매일 같이 업로드된다. 2~3년 동안 잘 모아 둔 적금으로 명품을 구매하는 일이 발에 차이듯이 자주 일어난다. 나의 최악과 그들의 최고를 자꾸 비교하다 보면 자존감이 바닥으로 내팽개치게 된다. 브런치 스토리는 어떨까? 절망이 기록되어 있다. 넷플릭스보다 더한 현실이 있다. 한동안 브런치 스토리를 점령한 주제가 있다. '이혼'이다. 인생의 변곡점이 될 수 있는 일들을 글로 기록하고 나눈다. 어떤 SNS 보다 생생한 현실이 있기에, 보지 않을 수 없다. 용기를 얻게 된다. 꾸미지 않은 나를 주저하지 않고 보여 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여기 브런치 스토리다.
마당 넓은 브런치 스토리.
<오징어 게임>. 세계로 뻗어나가는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만약'을 붙여 생각을 해본다. "만약 <오징어 게임>이 한국 방송국에서 송출되었다면?" 우선 제작이 될 수 있을까부터 짚어봐야 한다. 안 되었을 테다. 운이 좋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온갖 검열로 인하여 지금 우리가 보는 작품은 아니었을 테다. 천운으로 지금과 같은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한국에서만 주목을 받고 끝났을 테다. 어떤 마당에서 노느냐에 따라 같은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퍼지는 파급은 무척 달라진다. 다른 플랫폼에서 썼다면, 책을 낼 수 있었을까? 다른 플랫폼에서 썼다면, 인터뷰 기회가 왔을까? 되묻게 된다. 넷플릭스가 <오징어게임>을 만들었듯, 브런치 스토리가 지금의 내 글을 만들고 있다.
꿈은 내 상상이 미치는 곳 너머에 있다. 브런치 스토리에서 발행 버튼을 누르며 상상한다. 지금 내가 쓴 글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흰색에 검은색 커서가 깜빡인다. 타다다닥 글을 쓴다. 꿈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