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룩한 것인가, 소비된 것인가.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 킬리언 머리, 에밀리 블런트,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스포 많아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23년 작품, 지금 가장 핫한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았다. 많은 훌륭한 감독님들이 계시고, 신작이 나오면 서둘러 극장을 찾게 만드는 분들이 여럿 계시지만 그럼에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주저 없이 '크리스토퍼 놀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코엔 형제와 나란히 두었었는데 '시리어스맨'의 염세주의에 질려버렸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종종 묻는 질문.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예요?' 그 질문에 네 편의 영화 제목을 말하지만, 그 네 편 중에 놀란 감독의 영화는 없다. 그럼에도 가장 좋아하는 연출가는 바로 이 분이다. 아마도 나는 이 사람처럼은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티브이 프로그램 알쓸별잡에 놀란 감독이 게스트로 출연한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난 오펜하이머 ost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언제 나오나 몇 번을 확인하고 방송을 보았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의 지성과 겸손함에 더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버렸다는!
늘 압도적인 비주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를 만들어온 그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내려놓고 한 인물의 전기 영화를 만들었다. 전기 영화라고는 해도 뭔가 눈 요기할 수 있는 게 있겠지 했는데 그런 걸 기대하고 본다면 아마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결함 있고 복잡한 인물에게 역시 끌리는 나는 '오펜하이머'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따라가며 이해가 되기 때문에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놀란 감독 mbti 가 intj라는데 보아하니 확실하다! 같은 nt유형이라 그런지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이 부담 없고 그래서 오히려 공감하게 되었다는) 개봉 전날 예매하는 바람에 아이맥스 상영관 맨 앞에서 3번째 줄에 앉아야 했지만 어디에 앉았는지는 금방 잊고 영화에 몰입했다.
알쓸별잡에서 '이동진 평론가'가 한 질문은 이렇다.
"이야기를 구조화하고 플롯화하는 방식이 저를 가장 매혹시킵니다. 구조를 만들 때 이야기를 보고 특정한 구조를 먼저 생각하시는 건지, 이야기를 말하면서 마지막 단계에서 구조화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구조를 정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쓰지 않아요. 구조와 이야기를 같이 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제겐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고 전 이 시간을 즐겨요."
그렇다면 이 영화 <오펜하이머>의 구조는 어떨까? 위에 나열한 세 장의 사진처럼 영화는 세 가지의 시간대를 교차하며 보여준다. 먼저는 오펜하이머의 AEC(원자력위원회)의 보안 승인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는 시점 (영화 속 가장 마지막 시점으로부터 5년 전이다), 스트로스의 장관 인준 청문회가 열리는 현재,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청문회 내용을 바탕으로 오펜하이머의 대학 시절부터 현재까지 순차적으로 흐름이 진행된다.
오펜하이머의 청문회와 과거 이야기는 컬러로 표현되지만 스트로스 청문회 시점은 흑백으로 표현했다. 현재를 흑백으로 표현한 것은 감독의 관점이 들어간 탓일 테다.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는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는데 과학자는 모든 사상과 이론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내 키티와 결혼하기 전 사귀었던 애인 진 태트록(플로렌스 퓨)은 공산당원이었으며 키티(에밀리 블런트)의 산후 우울증 때문에 첫 아이를 잠시 맡겼던 친구 슈발리에 역시 당원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우울증이 있어 대하기 쉽지 않았던 진과 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유부녀였던 키티를 만났고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겨 각자 연인, 남편과 이별하고 결혼한다. (이런 과정이 있었지만 오펜하이머 부부는 끝까지 해로한다)
오펜하이머의 천재성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뿐 아니라 언어 능력에서도 드러나는데 몇 주 만에 외국어로 강의를 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버클리에서 첫 강의를 할 때는 한 명의 수강생뿐이었지만 학생이 점차 늘어나면서 인기 교수가 된다. 자신의 학문은 일상에선 별로 필요한 게 아니라고 여겼지만 세계 대전이라는 상황에서 나치라는 적수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전공은 가장 중요한 학문이 되었고, 정치가들이 가장 눈여겨보는 학자가 된다. 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하지만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장으로 가장 적합한, 능력과 리더십을 다 가진 사람은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3년 동안 과학자들을 이끌고 원자폭탄 만들기에 전념했고 독일 나치보다 먼저 만드는 데 성공한다.
중반부를 넘어서 폭탄이 제대로 만들어진 것인지 확인함과 동시에 직접 폭탄을 투하하지 않고 실험을 통해 폭탄의 위력을 보여줌으로 독일군을 항복하게 만들기 위한 트리니티 실험이 실행되는 시점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다. 바람이 불지 않아야 하는데 모래바람이 불고, 폭우도 내린다. 하지만 예정 당일 실험을 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가 '심장이 터질 것 같다'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긴장감 있게 표현되지만 그 긴박함은 글로는 표현이 안된다)
하지만 역사는 인간의 예측을 벗어나기 마련이다. 독일군은 항복했지만 일본은 끈질기게 물고 넘어지는 형국이었고, 태평양전쟁에서 자국민의 희생이 본토 국민들의 예상을 훨씬 웃돌자 미국은 이제 시선을 일본으로 돌린다. 게다가 2차 대전에서는 동맹이었던 소련이 대항마로써 세력을 키우며 미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과학자들의 역할은 폭탄을 만드는 것까지였다. 그것을 사용할지의 여부는 오롯이 정치인의 손에 달려 있었다. 트루먼 정부는 일본에 폭탄을 떨어뜨리기로 결정했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다.
오펜하이머는 폭탄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투하 여부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가졌다. 자신의 권한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폭탄이 떨어진 후의 결과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참혹하고 참담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그는 가슴에 큰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했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의 혼란함 속에서 자책했다. 그래서 동료 텔러가 수소폭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연구에 박차를 가할 때 오펜하이머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것으로 앙심을 품은 텔러가 후에 그의 보안 인가 승인 청문회에서 거짓 증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동위원소 수출 건에 대해 스트로스의 의견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데 얼핏 유머러스해 보이지만 완전한 조롱이었던 그의 발언에 스트로스 역시 크게 상처를 받고 복수의 칼을 갈게 된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면서 유력한 정치인으로 급부상하게 된 스트로스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오펜하이머를 쳐내기로 결심하고 그의 청문회에서 2:1로 반대표가 많이 나오면서 그는 AEC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라고 많은 과학자들이 생각하고 있었고, 모든 상황을 망상 섞인 자기 관점으로 해석하는 스트로스는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과학자 데이비드 힐은 스트로스의 장관 인준 청문회에서 5년 전에 있었던 오펜하이머 청문회의 실상은 스트로스의 복수심에 기인한 것이라고 폭로하고 몇몇 의원들이 이 일을 문제 삼아 반대표를 던져 결국 그는 장관 후보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한참 시간이 흘러, 노년이 된 오펜하이머.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백악관에서 상(엔리코 페르미 상)을 받는 장면으로 마무리되지만, 단지 상을 수여할 뿐이지 그의 명예회복이나, 복권은 아니었다고 한다. (상을 주고 나서도 그 상에 대한 권위를 깎아내리려고 했다고 함) 인류 역사상 과학적으로 가장 위대한 성취를 이뤄낸 인물 중 하나이지만 그가 이뤄낸 성취에 비해 그의 말년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내 키티, 딸 모두 10년 안에 죽는 비극적인 결말. 그가 소련의 스파이라는 오명은 2022년에야 완전히 벗겨졌다고 한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살면서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어디서든 '마녀사냥'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어떤 일이 이슈가 되면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같이 욕하고 손가락질한다. 누군가가 그렇다고 하는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쉽게 동조하면서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 진실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 그것이 나를 가장 숨 막히게 한다. 건강한 개인주의조차도 욕을 먹어야 하는 어마무시한 집단주의에 기가 빨린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서는 결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얼만큼은 해야만 한다. (내가 원하는 것만 하고 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가능하다고 해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왜 나를 몰라주느냐!'라고 한탄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진짜 잘난 사람들은 세상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처음에는 잘난 내가 선택한 것일지 몰라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역시 세상이다. 세상이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 아니냐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가 약하고 누가 강한가가 영원하지 않고,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변수(자연재해, 전염병 등)에 의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가진 것과 필요한 것에 의해 관계를 맺는 국가 관계는 불안과 위험이라는 요소를 본질적으로 떠안고 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라는 한 마디 말로 시작된 일은 수많은 관계들과 변수의 역학 관계 속에 휘둘리며 지배된다. 내 역할이 끝났다고 해서 그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사건의 과정 속에 있었던 인간은 이제 그 권한을 잃었다고 해도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잘난 사람을 동경한다. 꽤 그런 편이다. 그들의 재능과 의지가 부러울 때가 많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 역시 그렇다. 그러나 이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서는 그가 부럽다기보다는 '인생이란 뭔가' '사람이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이렇게 작은 것인가.' '잘날수록 세상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그를 소비하려고 하는구나. 추앙과 비난으로'라는 생각이 계속 들면서 뭉클하다고 해야 할까? 감정의 큰 요동은 없었지만 아릿한 느낌이 영화 보는 내내 지속됐다.
영화가 좋았던 이유 중 다른 하나는 오펜하이머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하고 이 인물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한 일과 겪은 일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극화하지 않았다. 다만 양자역학이라는 것을 시각화하고, 중간중간 소리와 함께 삽입한 것, 트리니티 실험, 스트로스 청문회를 흑백으로 표현한 것 정도가 영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영화를 두 번 봤는데 두 번 봐도 재미있었다. 본래 영화를 볼 때 정보 없이 보는 터라 오펜하이머가 어떤 일을 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봤는데 두 번째 보니 시간대가 잘 보여서 더 명확하게 이해가 됐다. 그리고 감독이 컷을 이어 붙인 것을 보니 진짜 이 사람은 완벽주의자 중에 완벽주의자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긴 시간을 표현하는데 세 가지 시간대를 교차해서 엮는데 얼마나 생각을 하고 생각을 했을지를 잠깐만 생각하는 데도 내 머리가 지끈거린다.
영화는 주인공 오펜하이머를 제외하고 크게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어떻게 했는가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과,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옳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
전쟁 후 한창 주가가 올랐을 때의 오펜하이머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숙이더니, 자신에게 망신을 주었다고 거짓말로 한 사람을 매장시킨 스트로스 (물론 동위원소 수출 문제로 스트로스의 의견에 반대했던 오펜하이머의 발언- 입장이 아닌 발언-이 옳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라도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원자폭탄 만들 때 혼자 수소폭탄 만들겠다며 어깃장을 놨을 때도 편을 들어주었던 오펜하이머를 후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신한 텔러, 오펜하이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면서도 그를 질투해 증언을 거부했던 로런스 같은 사람이 있다면 독일이 만들기 전에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위력과 부작용을 안 이후에는 사용금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실라르드, 핵무기 반대 운동에 서명해 달라고 했을 때 거절 당했으나 스트로스의 청문회 때 적극 오펜하이머를 옹호하며 스트로스의 실체를 까발린 데이비드 힐 같은 사람들로 말이다.
내 인생이라고 해도 항상 내가 주도권을 잡고 가는 것은 아닐 수 있다. 물론 자신이 끌려가는 줄도 모르면서 따라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억울한 상황임에도 파워게임에 밀려 휘둘리는 인생도 있는 것이다. 약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한 때는 세상을 호령했던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바로 내 삶에 대해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이다.
키티 오펜하이머는 소극적인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싸워라. 해보지도 않고 오명을 뒤집어쓰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녀의 이런 태도는 변하지 않는데 오펜하이머가 엔리코 페르미 상을 받을 때 텔러가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지만 거절하는 것으로도 분명히 드러난다.
내가 취하는 태도가 내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내가 최선이라고 믿었던 것을 했다는 것만으로 후회는 줄일 수 있다. 나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다.
또한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분명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너머의 것이 존재한다. 더 본질적인 것이, 더 강하고 위험이 것이 존재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면만 보고 쉽게 누군가를 판단하고 손가락질하는 태도만큼 값싼 것이 없다. 그런 것처럼 보여도 그런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해서 스트로스처럼 망상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지레짐작하며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태도는 성숙의 반대편에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고 잠깐이라도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다.
영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 크리스토퍼 놀란은 아마도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