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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Aug 30. 2023

이니셰린의 밴시 (2023)

- 갑작스레 찾아온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감독 : 마틴 맥도나

출연 : 콜린 파렐, 브렌단 글리슨, 케리 콘돈, 베리 케오간


마틴 맥도나 감독의 2023년 작품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았다. 들어본 적도 없는 영화인데, 인스타에서 팔로우하고 있는 분이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소개해주셔서 궁금증이 생겨 바로 찾아보았다. (디즈니플러스) 오프닝부터 아름다운 풍광이 완전히 눈길을 사로잡고 금방 몰입하게 되어서 앉은자리에서 끝까지 재미있게 잘 보았다. 마틴 맥도나라는 이름도 내게는 생소하다. 검색해 보니 <쓰리 빌보드>의 감독님이셨다. 그 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영화로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탔다는 것은 안다. (아마 그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영화가 너무 괜찮아서 감독님 다른 작품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리뷰를 쓰기 전에 주제를 어떻게 잡을까?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영화가 단순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아주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파우릭 설리반 (콜린 파렐)의 입장에서 보면 '상실'에 관한 절절한 내용이 될 수 있고, 콜름 도허티(브렌단 글리슨)의 입장에서 보면 '각성'과 '선택'에 대한 내용이 될 수 있다. 또 이니셰린이라는 섬마을 입장에서는 '고립'과 '한계'라는 측면에서 이 이야기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파우릭과 콜름 양쪽의 입장을 다 살펴서 '갑작스레 찾아온 변화에 대한 대처'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한다.



이니셰린은 파우릭과 콜름이 살고 있는 섬 이름이다. 영화에서 전면적으로 부각되지는 않지만 이들은 아일랜드의 작은 섬 '이니셰린'에 살고 있었고, 아일랜드 본토는 내전 중이었다. 영화에서 몇 번, 총소리와 뿌연 연기가 올라오고,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이 스쳐 지나가듯 나오는데 이것이 이니셰린이라는 섬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 작은 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또 이 작은 섬에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과 소소하게 일상을 나누는 것으로 하루하루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 설리반 (케리 콘돈)처럼 외로움을 느끼며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이 있는 사람도 있고, 도미닉(베리 케오간)처럼 하나뿐인 가족인 아빠한테 매일 맞고 학대당하며 살기 때문에 사람(여자)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부류도 있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콜름 도허티가 지금까지의 삶에 회의를 느끼며 변화를 꾀하는데 거기에 아무런 대비도 되지 않은 파우릭이 희생되는 것이다.


가축을 키우고, 거기서 얻은 유제품을 팔아 생활하는 파우릭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절친 콜름과 함께 펍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이 하루의 낙이다. 이 날도 어김없이 일과를 마치고 기분 좋은 얼굴로 콜름을 데리러 그의 집에 갔는데 분명히 안에 앉아 있는데,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것 아닌가.



파우릭이 무슨 말을 해도 들은 척도 안 하며 무시하던 콜름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은지 파우릭에게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자네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너무 지루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는 인생이 되고 싶지 않아. 앞으로 나는 음악을 만들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만한 작품을 만드는데 집중할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나에게 말 걸지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아 줘."


지금까지 수십 년을 동반자처럼 지내왔던 사람이, 갑자기 나와 나누는 대화가 무의미하고 지루하다며 절교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파우릭의 입장에서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고, 일단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콜름의 이 절교 선언을 '단순 삐짐'으로 받아들인 파우릭은 말 걸지 말라는, 아는 척하지 말라는 콜름의 요구를 가볍게 무시해 버린다. 다른 섬 주민들도 콜름이 너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들에게는 평소처럼 대하니 딱히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삐지지 말라며, 변함없이 그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파우릭에게 진절머리가 난 콜름은 무서운 협박을 한다.


"다음에도 나한테 말을 시키면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서 보낼 거야."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난다. 처음엔 하나의 손가락이었지만, 그 손가락을 던지고는 다음엔 4개를 다 잘라버리겠다고 선언한다. 시오반은 콜름에게 집착하는 오빠 파우릭을 다독여도 보고 설득도 해보고 직접 콜름을 찾아가 앞으로 오빠가 당신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파우릭의 마음은 잘 접히지가 않는다.



파우릭이 도미닉의 아빠 피더(이니셰린의 유일한 경찰- 매우 거칠고 폭력적임, 안하무인)에게 흠씬 얻어터졌을 때, 그 모습을 보게 된 콜름이 피더를 때려눕히고 파우릭을 일으켜 마차에 태워 집 근처로 데려다주는 일이 발생한다. 마음을 다 잡으려고 해도 콜름이 이렇게 나오니까 파우릭은 그를 포기할 수가 없어 또 애써 아닌 척, 모르는 척 그에게 말을 거는데, 그것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사이에 동생 시오반은 본토에 지원했던 교사일에 합격했다는 통지서를 받고, 도미닉은 용기를 내어 시오반에게 고백했다가 그 자리에서 차인다. 그리고 콜름은 아름다운 곡을 완성한다. 

파우릭은 도미닉의 조언을 듣고 다시 콜름을 찾아간다. 도미닉이 한 말은 '세게 나가라', '약한 모습 보이지 마라' 였던 것인데, (펍에서 파우릭이 참다못해 콜름을 비난하며 퍼붓고 자리를 먼저 떠났을 때, 콜름은 '본모습 중 가장 멋지다며 다시 좋아지려고 한다'는 농담을 했고 그 이야기를 도미닉이 들었던 것) 파우릭은 '다시 좋아지려고 한다'라는 말만 들리는 것이고, 그래서 그 나름의 센 척을 한다고 콜름을 찾아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 것이다. 거기다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리는데, 콜름이 만든 곡을 함께 연주하던 음대생에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가 왔다는 거짓말을 해서 콜름의 곁에서 떼내었는데 (파우릭이 생각하는 '세게 나가는 것'이란 이런 것이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콜름한테 한 것이다. 자신을 더 좋아해 줄 줄만 알았는데 반응이 싸하니 도미닉에게도 무용담처럼 꺼냈더니 도미닉마저도 '그건 너무 했다'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파우릭 같은 사람에게 휘둘릴 생각이 1도 없는 콜름은 자신이 뱉은 말대로 나머지 손가락 4개를 잘라서 그의 집 앞에 던진다. 내가 바이올린을 직접 연주하지 못하더라도 파우릭이 나가떨어져 주는 게 더 나은 것이다. '내가 정말 잘못 생각했나?'라고 시작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금까지 나누었던 시간들을 모두 뒤로 하고 내가 정말 싫어졌다. 지루하다는 말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가 그렇게 문제가 있나' '그 사람의 손은 괜찮을까'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다니 정말 못된 사람이다.'..



그런데 가족처럼 생각했던 파우릭의 가축 (애완동물에 가까운) 나귀가 콜름이 던진 4개의 손가락 중 하나를 입에 물었다가 목에 걸려 숨이 막혀 죽는다.  여동생은 갑자기 자신의 곁을 떠나겠다고 하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콜름은 자신을 받아주지 않지, 거기에 가족 같았던 나귀가 죽어버리자 막말로 파우릭은 꼭지가 돈다. 그래서 파우릭은 콜름을 찾아가 선전포고한다. 


"내일 12시에 당신의 집을 태워버리겠다. 당신의 개는 죽이고 싶지 않으니 일말의 양심이 있으면 개는 집 밖으로 내놓아라. 그 안에 당신이 있는 없든 상관없이 불을 붙이겠다."


그리고 콜름이 자신의 말을 지켰던 것처럼 파우릭도 자신의 말을 지킨다. 콜름은 파우릭이 떨어져 나가기만을 바랐을 뿐, 그의 나귀가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그냥 콜름과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경찰에게 얻어맞았을 때도, 그런 행동을 취했던 것이고, 자신도 개를 키우기 때문에, 또 파우릭이 그 나귀에 얼마나 애착이 있는지도 잘 알기 때문에 나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바로 사과를 한다. 정말로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미안하다고.


하지만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일은 생겼고, 두 사람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파우릭은 콜름이 개만 바깥에 내놓은 채 집안에 있는 것을 보고도 불을 붙인다. 시간이 흘러 잿더미가 되어버린 콜름의 집에서 콜름의 시체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 해변에 서 있는 콜름을 보게 된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 믿었던 일상이 한순간에 파괴되었을 때 나는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영화에 나와 있지 않지만 콜름은 '어떤 것'을 '계기'로 '각성'하게 된다.

'지금처럼 살면 안 된다.'라는 각성은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렇게 살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이어진다.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남은 인생은 '음악'에 집중할 것이며, 그러려면 '파우릭과 절교해야 한다'인 것이다. 지금까지 하루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벗이었으나 그렇게만 사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또 아마도 '내전'이라는 상황이 그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러다 무슨 일이 생겨도, 죽음이 눈앞으로 갑자기 찾아온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파우릭보다 훨씬 나이도 많은데,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가는 인생은 너무 허무한 것이다. (이것은 콜름이 예술가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이 크다. 그리고 나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렇게 콜름은 '각성'과 함께 자신의 삶에 변화를 꾀한다. 콜름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이며 필연적인 파괴이다.

하지만 상대의 결심으로 인해 수동적으로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파우릭에게 이 변화는 상처와 고통 그 자체이다. 자기 안에서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타인에게 지적을 받는다고 그것을 바로 문제로 인식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상대가 일방적으로 정한 관계를 어떤 반항도 없이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이 변화가 너무 급작스럽고 일방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부작용이 발생한다. 이 변화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으나 반드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에 그와 나 사이에 조율이 필요하다. 갑자기 잃어버리고 파괴되어 버리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파우릭의 언행을 보면 왜 콜름이 그와 절교까지 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콜름은 파우릭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자기가 좋으니까 상대도 좋을 거라고 믿어버린다. 그가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관심이 없다. 파우릭이 음악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작곡까지 하는 아티스트인 콜름이 그의 음악을, 음악을 향한 사랑을, 그의 가치관을 주제로 얼마나 대화를 하고 싶을지 단 한 번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파우릭은 매일매일 시답지 않은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콜름은 전혀 관심도 없는 얘기를, 같은 얘기를 수십 년 반복한다.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는 생각도 없다. 하지만 콜름은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벼락같은 각성'이 찾아올지 모른다.  삶을 바꾸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혼자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 삶의 변화는 반드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물론 그것이 서로에게 윈윈이 된다면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조율이 필요하고 변화를 받아들일 시간을 상대에게 주어야 한다. 그것이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파우릭이 사랑한 것은 콜름이라는 친구였을까? 아니면 무료한 자신의 삶에 일정한 시간을 함께해 주는 그것이었을까?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매일 나와 함께 즐겁게 수다를 떨어주는 것. 그것을 사랑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정말로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내게 해주는 것과 상관없이 사랑하는 것'은 인간에겐 불가능에 가깝지만 적어도 '사랑'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려면 사랑하는 대상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 힘써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을 쓰고 그렇게 해주려고 해야 한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그러니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의 '진짜 나'라는 사람에 관심이 있고, 그대로 받아들여주면서도 이해해 줄 때 정말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같이 보아주고, 이룰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도와주는 이들을 사랑한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깊은 대화를 나눌 때 살아있음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콜름이 잔인하다 싶지만 무척 이해가 된다. 파우릭이 집을 태워버리도록 그냥 두는 것은, 나귀를 잃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행동이다. 아마도 그렇게 콜름은 자신이 이해받기를, 파우릭 자신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오랫동안 바라왔을 것이다.  

다만 오랜 시간 함께했던, 여전히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친구와 이별해야 한다면 그만큼의 존중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랜 친구가 나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명확하다면 그것을 붙들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런 행동을 한다면 반드시 유치한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에게 중요하다면 중요하다고 믿어야 한다. 내가 예술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도 그것이 가벼운 것은 아닐 수 있다. 내게 중요한 것이 타인에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듯, 나에게 의미 없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부가 될 수도 있다. 타인을 타인으로서 존중하고 이해할 때 그 관계는 진실함을 가지고 롱런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을 나를 위해 존재하는 누군가로 여기지 않는 것. 그는 나와 다른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건강한 관계의 출발점이다.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재밌었고,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 영화에 대해 깊이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마틴 맥도나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다음 작품은 꼭 극장에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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