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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연춘추 Dec 14. 2021

1.6 브레진스키의 지정학 전략과 중앙아시아 블랙홀

비록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브레진스키 이전의 지정학자들은 대체로 지리학(라첼, 매킨더, 페어그리브, 코헨)이나 역사학 전공자(하우스호퍼)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오늘날 지정학을 국제정치학의 한 분류로 보는 우리 학계 연구자들에게 있어 생소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정학이 태동할 당시 국제정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학문이었으며, 매킨더조차 자신의 학문을 지정학이 아닌 정치지리학이라 이름 한 것으로도 보아 20세기 초 지정학 연구가 역사학, 인문지리학과 같은 인문학과 얼마나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도 중국에서는 여전히 지정학이 지리학이나 역사학의 소분류인 역사지리학의 범주에서 다뤄지는데 이는 지정학이 태동했을 당시의 전공 분류법에 따라 나눈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브레진스키 이후, 지정학은 국제정치학과 긴밀히 연계된 분야로 주목받는데, 이는 브레진스키가 백악관에 들어간 직후, 실행한 정책 가운데 상당수가 지정학적 판단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브레진스키는 지정학이라는 학문을 이용해 소련의 팽창을 억제하는 실질적 방법에 대해 고민했으며, 소련 해체 이후에는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따라서 여기서는 브레진스키의 지정학적 방법론에 대해 고민해 보도록 하자.


냉전 시기 브레진스키의 지정학 담론은 《게임플랜: 미소 경쟁을 소련과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Game plan: a geostrategic framework for the conduct of the U.S.-Soviet contest, 1986)》에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소련의 외교관이자 지정학자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외교 정책을 고민할 때마다 세계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브레진스키가 보기에 냉전 시기 세계는 여전히 심장지대 제국과 해양 제국 간 패권 전쟁이 지속되는 곳이었다. 독일 제3제국의 계승자로서 소련은 중부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고, 대영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한 미국은 해양 세계를 조직해 소련과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소 경쟁에서 미국의 우위를 강조했던 다른 전략가들과 달리 브레진스키는 냉전 초, 미국이 지정학적 열세에 놓여 있음을 시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질서는 미국과 영국, 소련, 중화민국이라는 4개 강대국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영국은 몰락하는 제국이었으며, 중국은 점차 발흥하는 신흥 강국이었다. 당연 중국과 정치적으로 연대한 소련은 지정학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던 것에 비해, 대영제국의 해체와 함께 미국의 지정학적 패권은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소련보다 안정적인 동맹체제 운영이 가능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 대서양 또는 태평양을 두고 있는데 비해, 소련의 주요 보호국은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소련은 자신들과 인접한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같은 동유럽 국가들과 역사 문제, 국경지대 분쟁으로 인해 끊임없이 마찰을 겪어야만 했고, 이는 바르샤바 조약 구성원 간에 이견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진먼다오 포격을 기점으로 시작된 중·소 분쟁은 심장지대의 정치적 분열로 이어지면서 유라시아 대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같은 소련의 지정학적 팽창에 대응하기 위해 브레진스키는 소련이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거나, 분쇄지대에 위치한 파키스탄, 중국에 경제적 지원을 함으로써 이들이 소련의 남하를 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브레진스키는 소련의 진출 방향을 ①라인강 유역, ②바투미-바쿠 라인, ③서태평양(북한, 베트남 통킹만)으로 설정하고, 소련이 북한과 통킹만을 근거지로 삼아 중국과 필리핀을 자국의 영향력 아래 두거나, 아프가니스탄을 거점으로 파키스탄과 이란에 진출할 경우, 미국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패권을 상실할 것이라는 최악의 예측을 전망한 다음, 이를 막기 위해 강력하고 연합된 서유럽의 출현과 미국-중국-일본 태평양 삼각대 강화, 파키스탄 지원과 이란과의 외교 관계 회복을 통해 소련의 팽창 의지를 꺾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아시아 문제에 있어 브레진스키는 중국이 소련에 의해 언제라도 포위될 수 있는 상황임을 지적하며,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지원 없이는 덩샤오핑의 개혁 성향 정부가 언제든지 내부의 보수파와 친소 성향의 정치인들에 의해 전복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과 일본이 지원하고, 중국은 내륙지대에서 소련과의 대치를 이어가는 태평양 삼각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브레진스키는 중국이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둥베이와 신장 지역을 개발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실크로드 부흥 계획을 도와 중국과 파키스탄이 가까워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중국은 소련의 남하를 막는 최전선이자, 미국과 이익이 상당 부분 일치하는 나라였다. 미·중 모두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이 철수하기를 원하며, 무자헤딘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베트남 통킹만에서 소련군이 철수하기를 요구하고, 몽골에 배치된 소련군 병력 철수를 요구했다. 중국에 대한 브레진스키의 지정학적 판단은 정치적 이벤트에 대한 그의 평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록 그는 키신저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대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높이 평가하며, 이 같은 외교 성과로 인해 소련이 기존에 일본과 한국, 필리핀에 가한 압력이 줄어들었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브레진스키는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가지는 지정학적 권익을 일부 인정하는 대신 베이징 지도부로 하여금 미국 중심 세계질서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게 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이란 등 페르시아·호라산 지역 문제에 있어서도 브레진스키는 소련이 바투미-바쿠 선 남쪽으로 남하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호메이니 정권의 수립은 이란에 친소 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꺾었지만, 이란과 파키스탄 모두 인종 문제와 종교 대립이 있는 고로, 언제든지 친소파의 쿠데타 또는 소련군의 남하에 의해 전복되거나 분열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했다(이에 대한 예시로 브레진스키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분열을 예로 들었다). 따라서 소련이 이들 국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를 지원할 뿐만 아니라, 이란과의 관계도 개선해야 한다고 믿었다.


유럽 문제에 있어 브레진스키는 핵무장을 위시한 군사력 강화가 소련 방면의 압력을 줄여준다고 믿었다. 일례로 그는 미국과 나토가 전술핵 배치, 공지전 개념 도입 등 군사개혁을 단행한 이후, 소련의 절대 방어선이 동독 국경으로부터 베를린까지 후퇴했음을 지적하며, 강력한 핵무장이야말로 소련에 대한 효과적인 압박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이에 따라 브레진스키는 핵무장 강화을 주문함과 동시에 프랑스와 독일의 군사 협력을 적극 지지해 유럽 국가가 스스로의 방어능력을 갖추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브레진스키는 고르바초프 시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난 소련 내 소수민족 분열주의에 주의를 기울이며, 향후 우크라이나와 체첸, 카자흐 등 무슬림 종족들이 제국의 해체에 결정적 역할을 하리라 내다봤다. 무엇보다 그는 소련의 해체가 과거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독립과는 전혀 다른 후폭풍을 불러오리라 예상했는데, 이는 해외 식민지와 달리 소련이라는 거대 제국의 해체는 곧바로 러시아에 대한 안보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레진스키는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폴란드, 루마니아와 같은 동유럽 국가들이 서유럽과의 직접적인 경제 협력을 강화하도록 주문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전 세계적 패권을 유지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rd: American primary and its geostrategic imperatives, 1997)》에서 소련의 해체로 기존에 조직화된 심장지대가 사라졌으며,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중앙아시아에 또 다른 발칸반도가 형성됐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옐친 정부는 1990년대 초 친 서방 외교정책을 이어갔으나, 나토의 동진이 가시화되자 반-패권주의 외교 노선을 지향하게 됐다. 이 같은 외교 노선 변화에 따라 옐친은 중국·이란과의 관계 개선에 큰 관심을 보이던 구 소련 출신 프리마코프를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했으며(1996), 이어 12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옐친은 반-패권주의를 비난하며,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천명했다. 이 같은 옐친의 반-패권주의 노선은 러시아와 중국,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참여한 상하이협력기구라는 반-패권주의 다자협력체로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이 같은 러시아 옐친 정부 후반기의 반-패권주의 노선에 대해 브레진스키는 냉소에 가까운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모스크바가 중국·이란에게 안전 보장을 제공하지 못하는 이상, 이들이 반-패권주의 협력체 결성에 호응할지 미지수일 뿐만 아니라, 설사 가까운 미래에 러시아와 중국, 이란이 이 같은 동맹을 결성한다 하더라도 3개국의 인구와 경제 규모, 공업 생산력을 고려할 경우, 이 반-패권주의 협력체는 중국이 주도할 것이라 내다봤다.

우크라이나 문제에 있어서도 브레진스키는 놀랄 만한 예측력을 보여줬다. 소련이 해체된 직후, 이데올로기가 물러난 자리에 신-유라시아 학파의 지정학이 자리 잡은 상황에서 모스크바는 구 소련 영토 회복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고, 이는 훗날 러시아와 서방의 충돌 요인이 될 것이라 예측했다. 이 같은 예고된 충돌을 막기 위해서는 모스크바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하고, 유럽 국가로서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며, 이 길만이 러시아가 서방세계와 공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외쳤다. 나아가 브레진스키는 우크라이나와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조지아 5개국 방위 협정에 주목했는데, 이 같은 친서방적 군사협력체의 형성은 러시아의 재차 팽창을 막음과 동시에 미국의 새로운 우군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중앙아시아 문제에 있어 브레진스키는 스파이크먼이 제창한 “힘의 균형” 논리를 적용했다. 그는 미국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 지역이 러시아나 터키, 중국과 같은 특정 세력에게 귀속되는 상황을 막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 서구 세계가 이들에게 대규모 경제 지원을 제공함과 동시에 아제르바이잔을 경유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해 러시아와 중국이 중앙아시아 자원을 독점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아울러 냉전 당시 중국의 실크로드 부흥 계획을 눈여겨본 전략가답게 브레진스키는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이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베이징과 모종의 전략적 제휴를 채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인종적으로 분열된 카자흐스탄에 모종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이란이나 인종적 동질성을 내세운 터키가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을 보며, 훗날 중국보다는 이란과 터키의 영향력이 더 지배적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소련 해체 후 동아시아 문제에 대해서도 브레진스키는 예리한 예측을 제시했다. 그는 중국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일본-중국 간의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고 생각했으며, 향후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지정학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성장하리라 내다봤다. 그러나 브레진스키는 중국이 2020년까지 전 세계적 패권국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일각의 예측을 비판하며, 중국이 그때까지 아시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로는 성장할 수 있을지 언정, 인구 구조와 자원 소비, 식량 문제와 군 현대화 등 문제에 발목이 잡혀 세계적인 패권국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중국이 아시아의 지역 강국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중국이 소련의 동유럽 공제와 같은 수준의 영향력 행사는 어려워도 주변국 정치에 점차 개입할 것이며, 중국 주변에 위치한 나라들 또한 베이징 지도부의 의중을 파악하기에 급급한 상황까지 발전하리라 내다봤다. 이중에서도 브레진스키는 베이징 지도부가 자신들의 지정학적 이익을 위해 파키스탄, 미얀마, 북한과 (사실상 동맹이나 다를 바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이 같은 중국의 성장은 인도차이나와 서태평양 국가들로 하여금 중국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거나 몇몇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 있어 베이징 지도부에 타협하는 상황까지 발전하리라 봤다. 이 같은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저자는 일본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언제든 북한과의 전쟁 발발 가능성이 있는 한국에 지속적으로 군대를 주둔시킬 뿐만 아니라, 중국의 타이완 무력 통일 시도에 맞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물론 브레진스키는 시종일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대륙과 타이완 사이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낮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브레진스키의 글을 보면 우리는 그가 지정학적 세계관에 입각해 외교 정책을 조언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소련의 지정학 전략을 읽어 내기 위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이용해 소련을 아시아 내륙지대에서 억압하는 전략을 구사했다는 점에 있어 우리의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사실상 그의 지정학 전략은 오늘날 세계질서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브레진스키의 지정학 전략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는데, 바로 미국 중산층의 피로감을 계산하지 않은 점이다. 비록 브레진스키의 전략대로 미 해병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시리아, 예멘 등지에서 자국 중심 세계질서를 거부하는 탈레반과 알카에다, IS 소탕 작전에 돌입했지만, 막대한 전비 지출로 인해 미 중산층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갔으며, 이들은 왜 자신들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사막 지대에서 청년들이 죽어야 하는지 되물었다. 그리고 워싱턴의 정치인들이 이 같은 시민들의 질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을 때, 미국 시민들은 트럼프라는 괴물을 만들었다. 트럼프의 재임기간 동안, 백악관의 참모들은 여러 외교적 실책을 저질렀지만, 이중에서도 가장 큰 잘못은 솔레이마니를 암살함으로써 (브레진스키가 그토록 경고한) 중국-러시아-이란 3개국의 지정학 동맹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끝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지정학적 패권을 상실하게 됐고, 흑해 대평원과 타이완 해협에서 중·러 군사협력체와 대립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어쩌면 완벽해 보이는 브레진스키의 지정학적 이론의 유일한 단점은 바로 미국 중산층의 피로도가 아닐까? 그리고 트럼프는 광적인 지지자들의 환호성 속에서 미국 중심 세계질서의 아킬레스건을 칼로 찌름으로써 80년 가까이 작동한 제국 체제를 붕괴시켜 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콜로세움에 쓰러진 콤모두스의 시체를 뒤로 하고 지정학의 시대로 향하는 아피아 가도에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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