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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연춘추 Dec 19. 2021

1.7 두긴과 신-유라시아 학파의 다극체제 구상

오늘날까지 활동하는 지정학자 가운데 알렉산드르 두긴처럼 모스크바의 국가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없다. 무엇보다 푸틴 시대에 접어들면서 신-유라시아 학파의 지정학 사상이 크렘린의 대외정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에 우리는 두긴의 지정학 서사 구조와 유라시아 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긴의 지정학 사상은 매킨더와는 다른 지정학적 서사 구조로부터 시작된다. 비록 앵글로-섹슨 계열 지정학자들과 같이 두긴도 세계사의 지정학적 구조를 대륙형 문명과 해양형 문명의 이원 대립으로 바라봤지만, 로마제국을 해양형 문명으로 보는 매킨더와 달리 두긴은 이를 대륙형 문명으로 이해했으며, 로마제국과 카르타고 사이에 발생한 포에니 전쟁을 대륙 문명과 해양 문명의 대충돌로 해석했다. 그가 보기에 스파르타와 로마제국, 몽골제국, 러시아로 대표되는 대륙 문명은 전체주의·집단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으며, 성실과 금욕, 절제를 미덕으로 삼으며, 이와 달리 아테네와 카르타고로 대표되는 해양 문명은 계급 사회와 자본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본의 지배 하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태만과 성적 타락, 향락 생활을 즐긴다. 카르타고의 영아 살해, 아세라 신전의 여사제들, 전쟁 때마다 동원되는 원주민 용병들 모두 카르타고가 대표하는 해양 문명의 전형적인 사회문화적 특징을 보여주며, 로마제국은 이 해양 세계의 중심지를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해양 문명을 대륙 문명의 지배 아래 둘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로마제국의 대륙 문명 정신은 비잔티움 제국, 이어 모스크바 대공국과 러시아 제국에게 계승되어 소련으로 이어졌다. 투란 제국의 황제였던 스탈린은 소련의 지정학적 입지를 이용하여, 유라시아 대륙에서 모스크바의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1945년, 분쇄지대에 위치해 있던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얄타체제는 세계 질서를 새롭게 규정하기에 이르렀으며, 세계인들은 다시금 스파르타-로마로 대표되는 대륙 세력과 아테네-카르타고로 대표되는 해양 세력의 충돌을 목도하게 됐다. 그러나 이 같은 지정학적 대결은 전적으로 소련에게 불리했다. 비록 스탈린은 베링해협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기는 했지만, 라인강과 뫼즈강, 아르덴 고원, 쥐라 산맥과 보주 산맥 등 자연 장애물로 이루어진 나토의 경계선에 비해, 하르츠 산맥을 시작으로 끝없이 펼쳐진 동유럽 대평원 지대는 소련의 지정학적 약점이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대규모 병력을 동독 국경지대에 배치하여, 나토의 동진 야욕을 꺾으려 했다. 그러나 자연 장애물이 없는 나토와의 실질적 경계선인 동독 국경에 불안감을 느낀 스탈린은 프랑스 좌파 운동 아랍 사회주의,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주의 혁명 등 좌익 계열 정치·사회 운동을 지지하여, 국경지대의 군사적 압력을 줄이려 했다.


그러나 흐루쇼프 이후, 소련은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에서의 군사적 후퇴를 거듭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심장지대가 정치적으로 분열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맞이하게 된다. 모든 제국체제는 더 이상의 팽창이 불가능할 때 붕괴된다. 거대한 지정학적 제국인 소련 또한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휘말리면서 더 이상 외적 팽창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간 제국 내부에 산재된 다양한 정치적 문제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이는 소련의 해체로 이어지고 말았다.


1991년 소련 해체는 카르타고 멸망과는 전혀 다른 지정학적 결말로 이어졌다. 미국을 위시한 나토와 해양 세계는 승자의 면류관을 쓰고 소련의 해체를 지켜봤으며, 매킨더가 그토록 주장한 심장지대 제국 해체와 우크라이나, 캅카스 등지의 러시아 이탈 구상이 현실화되었다. 세계의 지정학적 구조는 기존의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이원 대립구조에서 중심부와 주변부로 재편했다.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외에 다른 문명적 대안은 사라졌으며, G7로 대표되는 미국과 나토 제국諸國, 일본이 세계 질서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섬의 마지막 전쟁: 오늘날 러시아의 지정학(Last war of the World Island: The geopolitics of contemporary Russia, 2015)》에서 두긴은 해양 문명에서만이 적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다고 지적하며, 카르타고에서 볼 수 있던 배금주의와 영아 살해, 성적 타락과 같은 해양 문명적 요소가 이들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유일한 세계 패권국이 된 미국은 이제 소련을 대신할 다른 외부의 적이 필요했으며, 워싱턴의 정치인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이 역할을 맡겼다. 예멘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튀니지 등지에서 일어난 일렬의 전쟁과 혁명은 사실상 워싱턴이 자신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주입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정치적 이벤트이자, 일원화된 세계질서가 문명의 다양성을 어찌 부정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 할 수 있다.


힌두쿠시 협곡과 메소포타미아 대평원 지대에서 미군이 탈레반과 후세인 정권에 대한 소탕 작전을 벌이는 동안, 모스크바에서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어찌 받아들일지에 대한 정쟁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코지레프 독트린으로 대표되는 친서방적 정치인들은 미국의 세계 패권을 인정하고, 옐친 정부에게 워싱턴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최고 소비예트를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 공산당과 민족주의자들 등 대륙 문명의 신봉자들은 옐친의 친서방 정책을 맹비난하며, 대륙 문명의 보수적 가치관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들 사이의 대립은 1993년 러시아 헌정 위기 때 절정에 달한다. 해양 문명의 대리인들은 대륙 문명 수호를 요구하는 자들을 향해 포탄을 쏘아 댔으며, 대륙 문명 심장부에 승리의 깃발을 꽂았다. 그러나 해양 문명이 자신들의 승리를 축하하고 있을 때, 이들의 친서방 정책에 환멸을 느낀 옐친은 대륙 문명 지지자들의 뜻을 받아들여 프리마코프를 외무부장으로 임명하는 등 반-패권주의 노선을 지향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두긴은 러시아가 대륙 문명의 계승자임을 자각하고, 미국이 이끄는 해양 기사단에 반하는 유라시아 기사단을 조직해 미국 중심 세계질서를 해체하고, 세계섬의 문명체들이 자신들에게 부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를 위해 두긴은 모스크바의 정부 관료들로 하여금 이란과의 중장기적 동맹 관계를 추진할 뿐 아니라, 이들을 호라산 지역 조직화의 중심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은 모스크바와 테헤란에 충성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하며, 파슈툰주의에 입각한 자유로운 이슬람 연대 형성을 주문했다. 테헤란과의 동맹 관계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모스크바-델리의 관계다. 러시아는 파키스탄과 인도의 충돌 완화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델리 정부로 하여금 다양한 인종과 종교 집단의 공존과 번영을 보장하는 연방 구축을 촉구할 것을 요구했다.


투르크계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두긴은 러시아의 강력한 개입을 주문하고 있다. 비록 터키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흑해 등지 패권을 두고 다투는 사이지만, 터키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결국 모스크바-테헤란과 손잡을 것이며, 반-서방적인 유라시아 기사단의 일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 소련의 일부였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두긴은 이를 유라시아 연맹 결성에 적극적인 세력과 통합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누었으며, 이들에 대한 다른 대응을 주문했다. 유라시아 연맹체 통합에 적극적인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의 경우, 이들과 경제 공동체를 만들 것을 주문함과 동시에, 중앙아시아 대다수 주민들이 믿는 이슬람 신앙과 그리스도교 문명 간의 화해에 모스크바가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두긴은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친서방, 친중 행보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등이 참여한 경제 공동체가 형성될 경우,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며, 결국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리라 예측했다.


중국에 대한 두긴의 전략은 몇 차례 변화를 겪는다. 두긴이 보기에 중국은 러시아의 심장지대 이익을 위협하는 세력이자, 해양 세력과 타협한 나라로 규정했다. 따라서 두긴은 심장지대에 대한 중국의 위협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장과 카슈미르, 만주와 몽골 등지를 독립시켜, 이들을 양국 사이의 거대한 완충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의 심장지대에 대한 지정학적 통치가 생각보다 굳건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두긴은 2010년대 들어서 중국을 적대국보다는 경쟁자로 이해하고, “독립회랑獨立走廊” 지대를 중국으로부터 분열시키기보다는(더 정확히 말해 중국 분열을 먼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이벤트로 남겨두고) 말레이시아나 베트남처럼 남중국해 이권을 두고 중국과 다투는 국가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중국이 지정학적 강대국으로 성장하려 할 때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의 관계 개선 및 남중국해 유전 개발 지원을 통해 이 일대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를 줄이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대중 무역 분쟁으로 미·중 간 충돌이 격화되면서 두긴은 중국을 적대국이나 경쟁자가 아닌 동맹으로 이해하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가 중국과 러시아를 분열하려 들수록 더더욱 굳건히 뭉쳐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달리 두긴의 일본에 대한 평가는 시간을 거듭할수록 점차 비판적인 어조를 띄게 된다. 1990년대, 두긴은 일본의 반-서방적 움직임에 주목하며, 동아시아 조직화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주기를 희망했으나,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이 워싱턴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자, 두긴은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은 유라시아의 자원을 이용해 서방과 대립하는 것이라며 도쿄의 정치인들의 문화적 정체성 자각을 주문했다.


캅카스 지역 문제에 대해 두긴은 이 지역을 인종에 기반한 여러 나라들로 쪼개는 대신, 이들을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르는 느슨한 연방으로 묶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의 유라시아 연방 건설 제안에 호응하겠지만, 친-터키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은 틀림없이 반발할 것이며, 이 같은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러시아는 터키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이들의 연방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대로 친서방적인 조지아의 경우, 이 나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지아 정교회를 이용해 모스크바와 트빌리시의 문화적 연대감을 구축할 것을 주문했다. 우크라이나 문제에 있어 두긴은 유라시아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는 모스크바와 키예프, 아스타나의 연대가 필수적이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문화적 연대감을 이용해 하나의 연명체로 통합할 것을 주장했다. 달리 말해 두긴은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과 아르메니아, 몽골 등 루스와 투르크, 몽골 제족諸族이 연합한 새로운 연방을 창설하고, 중국 지배 하의 “독립회랑” 지역을 독립시켜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함께 새로운 제국의 위성국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두긴의 신-유라시아 학파가 꿈꾸는 세상은 유라시아 기사단이 미국 중심의 일원세계질서를 파괴하고, 미국과 EU, 터키, 이란, 인도, 중국이 각자의 지정학적 세력권을 가지는 다극체제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두긴은 중국과 EU의 남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러시아의 팽창으로 인해 더 이상의 동진이 불가능한 EU에게는 아프리카 대륙을 (보상 차원에서) 선물로 주고, 반대로 신장과 카슈미르, 만주 등지를 상실한 중국에게는 한반도와 타이완, 인도차이나 등지를 영향권으로 주어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다. 미국의 경우, 북아메리카를 벗어나지 말아야 하며, 라틴 아메리카를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이탈시켜 진정한 의미의 다극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같은 두긴의 다극체제에서 한국의 운명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두긴은 ①한반도가 중국의 전통적 세력권이자 중국의 영향권에 속해 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②일본이 동아시아 지정학 질서를 재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같은 두긴의 주장을 고려할 경우, 그가 생각하는 한국의 미래는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주변 강대국의 속국 내지는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벌어지는 미국과 중·러 군사협력체의 지정학 싸움은 사실상 브레진스키와 두긴의 싸움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해체하려는 두긴에게 있어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러시아는 자신들의 잠재적 위협이었던 중국을 빠르게 동맹으로 확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란을 모스크바의 든든한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한때 두긴의 이상적 구상에 불과한 유라시아 기사단은 모스크바와 베이징, 테헤란의 연대 속에서 현실적인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제 지정학적 우군을 얻은 모스크바의 다음 발걸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들은 모스크바와 키예프, 아스타나를 하나의 경제 공동체로 통일하려 할 것이며, 더 나아가 이 같은 경제 공동체에 기반한 또 다른 제국을 세우려 들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는 미국 내 트럼프, 자이한과 같은 “행운섬” 이론을 신봉하는 고립주의자들을 지원하여, 워싱턴이 “세계섬”의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있다. 비록 코로나 부실 대응으로 전통적 가치관을 우선시하는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이 됐지만, 이미 두긴이 오래전부터 구상했던 “유라시아 기사단”과 “해양 기사단”의 대결 구도가 확립된 상황이라, 미국의 지정학적 패권이 유효한지에 대해 물어야 할 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실패는 이미 일원적 지정학 구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긴의 표현을 빌리자면) 적그리스도적 성격을 띠고 있는 해양 세력과 도덕과 금욕·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대륙 세력 간의 아마겟돈이 예고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비록 두긴은 자신의 거대한 지정학 서사시에서 대륙 세력의 승리를 부르짖었지만, 최후 승리가 누구에게 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우리는 러시아인들이 미국과의 대결을 단순히 고토 수복이나 제국 건설이 아닌 지정학적 문명 대결로 이해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두긴의 영향력 아래, 러시아는 거의 모든 고등 교육기관에 지정학 전공을 신설했을 뿐만 아니라, 두긴의 지정학서를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인들이 미국과의 대결을 이성적인 손익 계산보다는 감정적이고 신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만일 강대국 간의 전쟁이 단순히 국가 이익을 증진시키거나 보호하기 위해 진행된 것이라면 이해관계의 조율만으로도 극단적 충돌을 피할 수 있지만, 만일 이것이 특정 신앙에 기반한 종교적 행위라면 그들의 신앙이 제시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전까지 충돌을 멈추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이 지정학의 신도가 됐다는 뜻은 이들이 지정학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전쟁도 불사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오늘날 워싱턴에서는 여전히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정치인들과 전략가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나는 이 같은 주장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위험한 생각이라 평가하고 싶다. 미국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반감은 이미 정치적인 이해관계 대립을 넘어 신앙적 차원까지 발전한 상황이고, 이런 모스크바의 정치인들이 워싱턴의 대중국 전략에 동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미국이 모스크바에게 회유책을 제시할수록 모스크바는 팽창에 필요한 힘을 비축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라시아 대륙과 전 세계로 확장하며, 미국의 영향력을 북아메리카 대륙에 묶어 두려 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워싱턴이 해야 할 일은 러시아와 사실상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중국과 이란으로 하여금 모스크바가 주축이 된 반-패권주의 동맹에서 이탈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방 문명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와 문화적 동질감은 워싱턴의 전략가들로 하여금 잘못된 선택을 내리게 할 가능성이 있으며, 자치 잘못하다가 카르타고 도시 파괴처럼 해양 문명 거점이 소멸되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맞이할 수 있다. 워싱턴이 해야 할 일은 막연히 중·러 군사협력체의 팽창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정학 대립구도를 인정하고, 자신의 우군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이란과 터키와의 불필요한 대립을 멈추고, 아프가니스탄과 카슈미르에서 파키스탄의 지정학적 우위를 인정하며,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동맹 관계를 와해하는 것만이 미국의 영속적 패권을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과 인도, 이슬람 문명과 같이 서구 문명과는 다른 형태의 지리·문화적 조건에 기반한 문명이 존재하며, 서구적인 가치관이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워싱턴의 위정자들이 다른 문명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상태에서 강압적인 수단만을 이용해 세계 패권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는 또 다른 패배를 불러오는 저주의 전주곡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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