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반도의 지정학적 성질을 논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주장을 접하게 된다. 첫째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정신적 후계자들로 이들은 우리나라가 북방 기마민족이 세웠다고 굳건히 믿으며, 경주慶州와 그 주변부에서 발견되는 북방 유목민족 또는 로마 세계의 유물을 한반도까지 이어진 초원길이 있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학계 일각의 주장은 《환단고기桓檀古記》 추종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중앙아시아와 중국 북부,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한 거대 제국 환국桓國 또는 마고麻姑의 나라가 존재했으며, 이들이 동쪽으로 계속 이동해 고조선이 형성됐다는 가설로 발전했다. 반대로 우리나라와 해양성의 관계에 대해 고찰한 이들은 많지 않다. 당장에 이름이 기억나는 학자들이 열명도 되지 않는 것을 보면 한반도와 해양성의 관계를 고찰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며, 이들이 세상에 내놓은 연구성과를 봐도 어떤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우리나라야말로 중국과 같은 대륙형 국가가 아닌 해양형 국가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로 알려진 고조선만 보더라도 중국과의 해양 교역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관자·경중편》에 보면 고조선은 발과 함께 제나라에 문피를 수출하는 무역국으로 등장하며,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 《위략》에 보면 고조선의 마지막 왕 준은 해중海中으로 도망간 다음 한왕韓王이 되어 고조선과 왕래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위만조선의 해양 활동 기록은 많지 않지만, 위만이 한나라 수군을 격파한 것과 고조선이 멸망한 다음 중국이 낙랑군을 통해 왜와 교통 한 것으로 보아 강한 해상 역량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지리적 요인 때문에 고구려 시조 추모왕 일파는 남만주를 가로질러 졸본으로 달아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와 자라로 표현된 세력이 도강을 도왔던 것으로 보건대 당시 휘발하 수로를 이용해 무역에 종사했던 예맥계 유민 집단이 이들의 도하를 도왔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또한 고구려 땅을 떠난 다음 미추홀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낙랑 땅을 가로질렀다고 보기보다는 압록강 수로를 타고 서안평까지 이동한 다음, 다시 서안평 앞 압록강 하구에서 미추홀(인천)까지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해상 이동은 비단 고조선, 백제 등 황해 연안지대뿐만 아니라 영남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라 탈해 이사금은 다파나국에서 태어나 가야에서 수로왕과 싸운 다음 신라로 떠내려왔으며, 수로왕의 아내 허황옥 또한 전설적인 도시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남가라국까지 왔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오래전부터 육상보다는 해상을 중심으로 활동한 민족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 기록된 민족 이동로와 교역로
당연히 이 같은 해양성은 고구려, 백제의 해상 무역과 장보고로 대표되는 신라의 대당 무역으로 발현된다. 물론 모든 국가가 해양성 국가였던 것은 아니다. 부여처럼 속말수 유역을 지배한 나라도 있는가 하면, 고구려처럼 요수 너머 요서 지역도 지배한 나라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송요평원이라는 분쇄지대에 위치한 국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일 뿐이지, 한반도처럼 해양성이 강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에 놓인 나라가 대륙형 국가로 도약한다는 것은 일장춘몽에 가깝다. 실상 우리의 공간적 특징은 우리가 그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제한된 농지와 거대 인구를 부양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생산량은 일찍이 예맥계 농경민으로 하여금 중국과의 교역을 선택하게 만들었으며, 자체적인 농경문화를 발전함과 동시에 해양 교역을 통해 부족분을 채우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만들었다. 역설적이게도 한반도에 거대 기마민족 이동이 있었다는 기록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모용선비의 기마군단이 고구려 수도를 유린하기 전까지 한반도에 강력한 기마군단이 존재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으며, 동천왕의 “철기鐵騎”조차 위나라 조조가 편성한 철기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환단고기》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기마민족 이동이라는 거대한 서사시는 극우적인 민족사관에 빠진 자들의 억측에 가깝다.
이 같은 한반도의 공간적 특징을 고려해보면 우리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와 가장 가까운 동방의 해상 민족-한국인을 발견하게 된다. 이 민족은 그리스처럼 ①비록 농업경제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지만 ②부족한 농업 생산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해 연안항로를 통해 중국(그리스의 경우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이집트)으로부터 부족한 물품을 수입하고, ③중국과의 접촉을 통해 배운 기술을 접목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처럼 공동의 적에 대항해 단결된 힘을 보여주지만, 반대로 (여러 산맥으로 분리된 그리스와 같이) 지역색이 강하고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치세력화가 유독 다른 나라에 비해 두드러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이는 왜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풍부한 생산량 때문에 ⓐ생산보다는 자원 분배와 ⓑ분배 수단인 유통망이 더 중요한 중화제국에 비해 ⓐ단결된 힘을 이용해 해상 진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으며, ⓑ기술력과 기여도에 입각한 자원 분배를 태생적으로 체감할 수밖에 없는 성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오히려 조선왕조 이래 실시된 《주례周禮》식 국가조직체계는 정치적 통일을 위해 우리의 해양성을 억제했으며, 정부로부터 허락된 해양 무역과 통제되기 쉬운 육상 무역 외의 일체 대외 교역을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의 역사는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대륙형 국가의 정치제도로 공간적 본능을 억압한 불행한 역사라 할 수 있으며, 해양성의 말살과 한국적인 정치제도의 발전을 저해한 퇴보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정치적 퇴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공간적 특징은 여전히 유학적 담론에서 새로이 살아나게 된다. 마키아벨리적 담론으로 제국을 통제하고, 역사적 케이스로부터 여러 변수들을 습득하고, 이 같은 변수가 불러올 혼란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던 중국과 달리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제한된 물자의 이용방법을 고민했던 그리스처럼 사물에 대해 깊이 있는 탐구를 즐겨하게 됐으며, 이는 형이상학 발전과 운명론적 종교성으로 발현하게 되며, 중국과는 다른 자신들만의 유학 담론을 만들어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 같은 한반도 내부의 유학적 발전은 역사 고증과 문헌 고증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위로 쌓아 올린 것이기에 역사학적 검증의 칼 앞에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방이 산맥으로 격리되고, 바다를 통해서만이 부족한 자원을 얻을 수밖에 없는 제한된 공간성이 어떤 형태의 학문이 발전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공간과 공간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보니 수리적 방법을 통해 공간 면적을 측정해야 했던 중국과 달리, 자연경계로 공간 경계가 명확히 나뉜 한반도는 각 부족 간의 경제적 이익을 상호 간 약속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으며, 이는 정치적 권위를 통해서만이 수리적 방법의 효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중국과는 다른 정치체제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부족 연맹체를 미개한 정치체제로 보지만 어쩌면 공간적 경계가 명확한 한반도에서는 이 같은 정치제도야 말로 일종의 원시적인 대의제요, 우리의 지정학적 성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정치체제였을지도 모른다. 고도로 근대화된 대의제인 의회제가 한반도에 들어오자, 우리는 아무런 역사적 뿌리가 없음에도 빠르게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는 역사적 경험보다 더 근본적인 공간적(또는 지정학적) 구조가 민주주의를 발전하기에 유리한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 지정학의 목적은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첫째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한반도의 공간적 특징상 가장 알맞은 정치제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선택한 여타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우리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는데, 왜 이 같은 정치적 변화가 가능했는지, 이 같은 정치적 변화가 가능했던 지리적 요인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둘째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대륙 기마민족설을 부인하고, 해양 담론을 발전시켜야 한다. 중국으로부터의 문화 유입을 강조하는 기존의 사관은 우리를 대륙형 국가로 오판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정학적 발전 방향을 대륙으로 돌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조직화된 대륙형 국가인 중국과 극동 지역의 지배자인 러시아와의 전쟁은 우리나라의 멸망을 부르는 주문이요, 어떤 경우에도 피해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라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요동을 실제로 지배했던 적은 따지고 보면 전기 고조선, 고구려 전성기와 후기뿐이고, 이후로 이 지역에 대한 어떤 실효성 있는 지배체제도 확립하지 못했다. 우리는 압록강을 경계로 한반도에 뿌리내린 지 천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 천년도 더 된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대륙형 국가로서의 성격을 가진 기간은 짧았을 뿐만 아니라, 매번 중국의 물량공세에 밀려 (중국의 지정학적 팽창 한계선인) 천산산맥千山山脈 동쪽으로 후퇴해야만 했던 가슴 아픈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반대로 해양으로 진출했을 시, 우리는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바다는 중국과 인도차이나 제국諸國, 심지어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한 토하라까지 통하는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부와 풍요로움을 보장하는 안전장치였다. 한반도 삼면을 둘러싼 바다는 천산산맥과 장백산맥, 개마고원 등 남만주 일대에 겹겹 쌓인 천혜의 장벽과 함께 우리를 중국과 유목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줬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전쟁 중에도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일본과 말갈 등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는 자연조건을 제공했다. 따라서 해양, 그리고 해양세력과의 연대는 우리의 번영과 함께 안전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틀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진일보한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한 해양력을 갖추고 바다로 진출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고로 오늘날 지정학자들이 할 일은 민주주의와 해양성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나라의 해양성에 대한 역사지리학적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며, 이 같은 연구를 통해 우리가 농경 문명에 기초한 해양성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우랄-알타이어계라는 환상을 버리고, 유목민족의 후예라는 공상空想으로부터 벗어나야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의 해양성과 마주할 수 있다. 대륙성 또는 대륙형 국가를 추구하는 길을 필연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권위주의 국가로 만들 것이요, 종국에 이르러 우리의 해양성을 파괴하고 중국에 다시금 예속되는 결과만을 불러올 것이다. 우리는 중국 대륙으로부터 오는 강력한 인력引力에 맞서 해양성을 키우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이룩함으로써 특정 세력에 종속되는 것이 아닌 이들을 연결하는 강력한 교두보 국가로 성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지정학 연구자들에게 남겨진 숙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