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이 카불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이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외출할 때 니캅이나 부르카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칸다하르의 탈레반 정부는 여성들에게 차도르 착용을 성문화 된 법령 형식으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면 탈레반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이슬람교의 여성 억압 상징으로 여겨지는 부르카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오래됐으며, 심지어 귀부인들만이 착용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나 다를 바 없었다.
역사상 길거리 여성들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린 나라는 아시리아 제국이다. 진귀한 나무들로 장식된 엑바타나의 정원에서 가지각색의 뱃머리 장식을 자랑하는 상선들이 즐비한 티로스 항구까지 지배한 이 오리엔트의 패자는 여성들이 자신의 얼굴을 내밀고 밖에서 활동하는 것에 크나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아시리아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아시리아 제국이 중흥할 수 있던 역사를 살펴보면 세미라미스의 원형으로 알려진 여걸 삼무 라마트 여왕의 활약상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벌어진 삼무 라마트와 아들 아다드 니라리 3세의 권력 투쟁 때문인지 몰라도 오리엔트를 통일한 거대 제국 아시리아는 제국 영토 내에 있는 신민들에게 여성의 얼굴을 가릴 것을 명령했다.
이 끔찍한 명령에 대해 아시리아의 점토판은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①기혼 또는 미혼 여성은 반드시 천으로 얼굴을 가릴 것이며(히잡을 생각하면 된다), ②귀족의 딸들은 반드시 긴 천으로 자신의 몸을 가릴 것이며(차도르를 생각하면 된다), 이들의 시종을 드는 여성들도 자신의 몸을 가려야 한다. 따라서 아시리아의 거리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여도 되는 여성은 단 두 종류에 불과했는데, ①신전에서 일하는 미혼 여성과 ② 창녀였다. 창녀의 경우, 역으로 반드시 얼굴을 드러내야 했는데, 만일 창녀가 히잡과 차도르를 연상케 하는 옷을 입을 경우, (신체 절단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아시리아답게) 일반인 행세를 한다고 양쪽 귀를 잘라버리고, 반대로 일반인 여성이 히잡이나 차도르를 연상케 하는 가리개를 착용하지 않을 경우, 얼굴에 역청을 부어버렸다. 심지어 이를 목격한 남성이 고발하지 않을 경우,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하여 양쪽 귀를 자르고 군대 복역까지 시켰으니 2천 년 전 아시리아 제국 수도 니네베의 거리 풍경과 오늘날 탈레반 치하의 카불 거리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으리라 본다(탈레반이 관대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다).
그러나 제국의 강력한 법령은 생각보다 효과적이었는지, 아시리아 북부와 시리아 지역의 여성들은 오랜 세월 자신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귀부인들은 외출 시 차도르를 연상케 하는 가리개를 착용했다. 세월이 흘러 시리아에서 전해진 이 악습은 이상하게도 로마 귀족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자기 아내와 딸에게 차도르를 입히기 시작했는데,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이 워낙 크다 보니(당시 제국의 영토는 다뉴브강으로부터 나일강에 이르렀다) 로마법으로 통치되는 지중해 연안 지역 여성 귀부인들도 차츰 이 최신 트렌드에 따라 차도르를 입고 외출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차도르와 히잡의 보급 과정을 보면 우리는 이슬람교보다는 그리스도교의 역할이 더 컸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 신분 차별적 요소가 강했는데, 차도르는 오로지 귀부인 또는 귀족의 딸들만 입을 수 있는 것인데 반해, 히잡은 중산층 또는 하층민 여성들만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귀족 여성들은 비싼 염료와 보석으로 자신들의 가리개를 꾸밀 수 있었지만, 일반인 여성들은 가리개 착용이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싼 염료로 가리개를 염색하는 것은 더더욱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 차별이 일상화된 그리스도교 제국의 통치를 타도하고 평등을 부르짖던 이슬람교가 오리엔트의 주인이 되면서 이런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이슬람 성직자들은 과거 신분 제도를 상징하던 차도르를 귀부인민 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들이 착용할 수 있게끔 하는 새로운 법을 제정했을 뿐만 아니라, 두 번 다시 히잡이나 차도르의 색깔이나 장식으로 부유함을 나타내지 못하게 얼굴 가리개의 색상을 검은색 계열로 통일했다. 이 대목에서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지중해 전역으로 전해진 귀부인들의 전용 옷 차도르는 모든 사람들이 착용할 수 있는 옷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카불의 거리를 둘러보면 니네베의 귀부인들처럼 자신의 몸을 차도르라 가린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여성들은 과거와는 다르게 차도르를 더 이상 귀부인들만의 전용이라 생각하지 않고, 비잔티움 제국의 시민들처럼 하나의 특권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만인평등과 하층민 여성의 권익 신장을 나타내는 차도르는 또 다른 억압의 상징이 되어버렸으며, 얼굴 가리개를 벗는 것만이 진정한 여성의 주체성을 나타낸다고 외치는 인권 단체들의 목소리로 인해, 이 평등의 날개는 어느 순간부터 신분제 타파와 사회적 평등을 상징하지 않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남근 폭력의 상징물로 전락해버렸다. 이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지켜보면 어딘지 모를 기괴함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해한다. 아시리아 제국이 망한 지 벌써 2630여 년이나 흘렀으며, 과거 평등을 상징했던 옷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또 다른 억압의 상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지 차도르를 이슬람교의 문화라며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몇몇 목회자들을 보면 왠지 모를 답답함과 씁쓸함이 마음 한 켠에서 생겨난다. 차도르는 그들이 “하느님의 도구”였다고 말하는 아시리아 제국 시대부터 착용한 오랜 습관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그리스도교 제국인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널리 보급된 풍습이기 때문이다(오히려 일반 여성은 착용이 금지됐다). 만일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은 비잔티움 제국이 차도르를 보급시키는 것이 아닌 금지시키는 방향으로 법을 제정했더라면 오늘날 카불 거리의 풍경도 지금과는 180도 다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