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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연춘추 Dec 12. 2021

1.2. 페어그리브의 분쇄지대론과 역사지리학 비평

비록 매킨더의 학설은 나치 독일과의 연관성 때문에 살아생전 비판을 받았지만, 당대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매킨더의 제자인 페어그리브는 대륙형 국가와 해양형 국가의 대립 구조를 차용해 지리결정론에 입각한 새로운 역사 연구서 《지리학과 세계 패권(Geography and world power, 1915)》을 집필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페어그리브는 매킨더의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나는데, 과거 매킨더는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적 팽창 노선을 견지하는 원인을 자원에 대한 지배욕이라 지적하며, 자원을 균등히 분배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론 제시야말로 전쟁을 멈추고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다. 이 같은 매킨더의 주장을 받아들인 페어그리브는 인간의 역사를 “자원에 대한 지배의 역사”로 규정하고, 자원 분포와 긴밀히 연계된 수자원, 산맥, 기후 변화 등 자연환경이 인간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연구했다. 따라서 저자는 매킨더식 육상 늑대와 해상 늑대라는 이원론적 대립구도에 기반하여 유럽 제국諸國을 ①삼림지대에 기반한 육상 세력(독일, 러시아)과 ②수로 및 해운을 기반으로 하는 해상세력(스페인,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으로 나누고, 한 국가의 공간적 특징이 교통망 건설과 국가적 행위와의 연계성에 관한 추론을 제시했다. 일례로 해양세력인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경우, 중세기 로마제국이 건설한 도로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센강과 마른강, 우아즈강, 루아르강으로 연결된 하천을 이용한 수로 운송을 통해 비교적 자유로운 화물운송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센강과 우아즈강, 마른강 합류지점인 파리는 물류중심지를 넘어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라인강을 이용해 스위스까지 모직물을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초원지대 유목민족의 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야 했던 모스크바 대공국의 경우, 자신들의 수도를 삼림의 보호를 받음과 동시에 볼가강 수운을 이용할 수 있는 모스크바를 수도로 삼았다. 비록 삼림의 제약으로 인해 모스크바의 도시 규모는 더딘 성장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림지대와 초원지대 경계선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모스크바는 초원지대의 몽골족과 삼림지대의 슬라브족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아울러 페어그리브는 외부의 도전이 한 사회의 조직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는데, 이 같은 지리학적 관점의 그의 독일 연구에서 두드러진다. 한 나라의 수로 운송체계 중심인 프랑스의 파리와 폴란드의 바르샤바,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의 한가운데 위치한 로마와 달리 전통적 의미의 독일 영토에는 이 같은 자연환경적 요소에 의해 수도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은 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독일 주요국 수도(프로이센의 베를린, 오스트리아의 빈)들 모두 외부의 도전에 노출된-이 때문에 빠르게 조직될 수밖에 없는-환경에 놓여있었다. 일례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경우, 판노니아 초원과 다뉴브강 상류, 보헤미아와 아드리아해 무역권이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해 있다 보니, 판노니아 초원에서 오는 유목민족들의 침입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빈으로 하여금 빠르게 군사 도시로서 조직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북독일 평원에 위치한 프로이센 또한 폴란드와 포메라니아 일대에 거주하는 삼림 민족-슬라브족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유사시 국가 역량을 한데 모을 수 있는 베를린을 수도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한 국가의 수도는 육로/수로 운송체계와 같은 교통 인프라적 요소 외에도 군사적 요인에 따라 정해질 수도 있으며, 이 같은 군사적 요인도 결국에는 자연환경적 요소의 영향을 받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페어그리브는 러시아의 시베리아·극동 진출로 인해 심장지대가 조직화되면서 전 세계의 지정학적 대립구도를 ①러시아의 심장지대 제국, ②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해양제국, ③이들 사이에 위치한 분쇄지대(Crush zone)로 나누었다. 이 같은 삼분법은 사실상 매킨더의 “중심지대(심장지대)→반월지대(분쇄지대)→해양세력 영향권” 삼분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페어그리브의 역사지리학과 매킨더의 정치지리학 사이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 할 수 있다. 다만 분쇄지대에 대한 페어그리브의 주장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매킨더의 충실한 계승자일 뿐만 아니라, 그의 학설을 발전시키기 위해 고민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그의 분쇄지대는 심장지대 제국과 해양 제국 사이의 완충지대 성격이 강할 뿐만 아니라, 매킨더에 의해 교두보 국가(프랑스, 네덜란드, 한반도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로 분류된 대다수 지역을 포괄함으로써 심장지대와 해양세력 영향권과는 구분되는 또 다른 성격의 지정학 지대로 이해되었다. 또한 분쇄지대의 정치적 분열에 대해 페어그리브는 자연환경에 기반한 공간 지배적 성격의 자원 분포와 혈연 위주로 조직화된 독립적인 인종 집단 때문에 정치적 분열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만일 이들이 하나의 정치세력에 의해 조직화될 경우, 심장지대와 해양 진출을 동시에 시도하는 강력한 제국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


당연하지만 페어그리브의 분쇄지대론은 동시대 미국의 지정학자 스파이크먼의 림랜드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분쇄지대(반월지대) 조직화를 통해 제국으로 성장한 나치 독일과 일본제국의 팽창을 목격한 스파이크먼이 보기에 매킨더의 심장지대 제국보다는 림랜드를 조직화한 제국이야말로 미국의 안보 위협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그는 페어그리브의 주장대로 반월지대를 조직화하는 제국이 미국 안보에 미칠 위협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는 한국과 같은 분쇄지대에 위치한 나라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분쇄지대 조직화는 심장지대와 해양세력 영향권에 비해 어렵지만, 중국이나 독일의 예에서도 보아 알듯이 조직화에 성공할 경우, 대륙과 해양의 자원을 동시에 이용해 빠르게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쇄지대 제족諸族의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의식은 이들이 부족주의와 종파주의, 내셔널리즘 공동체를 벗어난 제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기에 이들이 지정학적 공간을 기반으로 하는 제국으로 성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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