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서 만난 그 아이
빌어먹을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다. 발목을 넘어선 눈은 이틀이 지나니 무릎까지 차올랐다. 고향에서도 이 정도로 눈이 내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로비에서는 종일 뉴스를 틀어두고 나는 하릴없이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그 유튜버가 말하던,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일까. 수천 km를 날아왔더니 냄새나는 호스텔에 박혀 며칠 동안 시리얼만 퍼먹고 있는 이 상황이 믿기질 않았다. 애초에 내가 여행을 온 게 맞을까. 비행기를 탈 때부터 정신이 몽롱했었다. 밤낮없이 계속 켜놓는 조명에, 자고 일어나면 밥을 먹는 것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안전띠 매라는 표시등과 함께 이곳에 도착했다. 여행이 이렇게 어이없도록 지루할 리가 없었다. 인셉션에서처럼 나는 어느새 코브에게 잡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직 나는 드림머신에 연결된 채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않은 게 틀림없다.
“세오영, 눈이 빌어먹게 많이 와.”
익숙한 기계음에 현실로 돌아왔다. 창밖 풍경은 이틀 내내 새하얀 눈발만 보였다. 이게 프라하라고? 프라하의 봄에서 봤던 사비나와 프란츠가 나누며, 본드, 본, 헌트가 뛰어다니던 스파이의 본고장의 풍경이 전라도 시골과 다른 바가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세오영이 아니라 서영이라니까.”
나는 볼멘 목소리로 말하며 스마트폰을 가져왔다. 구글 번역기에는 ‘Seoyoung’이라는 글자가 쓰여있다. 나는 그걸 ‘Seo young’으로 바꾼 뒤 재생 표시를 눌렀다.
“설영, 써영, 선영.”
몇 번이나 반복해 듣고 말해보지만, 그는 한 번도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한 적이 없다. 그는 몇 차례 내 이름을 중얼거리더니 환하게 웃는다.
“산, 장 보러 갈래? (San, ¿quieres ir de compras?)”
나는 소파에 반쯤 기댄 그를 향해 물었다. 그를 볼 때마다 ‘내가 여행을 오긴 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 옆에 앉은 채 한국어를 연습하는 그는 ‘산’이다. 원래 이름은 발음하기 훨씬 어려운 글자였다. 그의 이름을 듣고 당황스러워하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그는 자신을 산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내 이름이 원래 발음하기 어려워.”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사실 나는 그의 이름 때문에 당황했던 것은 아니었다. 4인실 방의 룸메이트가 남자라는 것에 머리가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나는 살면서 남들과 같이 방을 써본 적이 없었다. 숙소를 예약할 때도 4인실이라는 것에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여행은 새로운 경험들이 기억에 남는다고, 그 유튜버가 공항에서 노숙했던 이야기를 풀어내며 말했다. 노숙은 하지 못 해도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캐비닛은 두 명당 하나고, 아래 침대는 아래 칸 쓰도록 해.”
배가 거대하게 튀어나온 백발의 호스트는 친절이라곤 조금도 없는 무심한 말투로 이 말만 하고는 방을 나섰다. 나는 말문이 막힌 채 방을 둘러봤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의 간격을 두고 2층 침대 두 개가 양 벽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침대 프레임에 붙어 있는 연두색 캐비닛이 있었다.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캐비닛에는 손바닥 크기의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몸을 가릴 수 있는 칸막이도, 침대 커튼도 없었다. 샤워 후에 옷은 어떻게 갈아입고, 자다가 화장실은 어떻게 가? 뒤척이기만 해도 다 들릴 텐데. 방 안에서까지 속옷을 입고 있어야 해? 온갖 질문이 한국말로 떠오를 때-
“네 이름은 뭐야?”
영어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손을 내민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는데 인사도 안 했구나.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서영.”
인사말은 미리 준비했다. 반가워, 나는 서영이고 한국에서 왔어. 프라하는 처음이지만 일본으로 여행은 해본 적 있어. 너는 여행 가본 적 있니? 아까 인사의 원래 버전이었다.
“내 이름은 산이야.”
“산? 네 이름은….”
“그냥 산이라고 불러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그를 바라봤다. 그 아이는 새하얀 손바닥과 대비되는 진갈색의 탄 듯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길어 내가 두 손으로 잡아야지 겨우 감싸 쥐어지는 손이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그의 얼굴이 겨우 보였다. 머리 하나는 차이 나는 듯한 키와 대비되게 앳된 얼굴이었다. 밝은 갈색의 눈동자에 새까만 동공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손가락이 길다.”
그것이 산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약간 마르고 길게 뻗어져 있지만, 잡았을 때 단단한 젊은 나무 같았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폭소를 터트렸다. 그렇게 웃을 정도인가.
“일단 짐을 넣어야 할 거 같은데. 네 짐이 무거워 보여.”
그는 내가 매고 있는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절실하게 동감하고 있었다. 여행 가방은 내 키의 반절은 되었고 아무리 고쳐잡아도 가방끈은 금세 어깨를 파고들었다. 분명 후회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출국 직전까지도 덜어냈지만, 가방 크기는 그대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끌고 다니는 여행용 가방을 사는 거였는데. 하지만 그 유튜버 언니는 모든 영상에서 매는 가방을 들고 다녔다. 여행지에서는 도로가 울퉁불퉁해 끌고 다니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행은 처음이야?”
그는 캐비닛에 걸린 자물쇠 다이얼을 돌리며 물었다.
“일본여행은 가봤어.”
“가방끈이 안 맞춰져 있길래. 그거 안 맞추면 어깨가 엄청 아팠을 텐데.”
그는 내 가방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그제야 내 가방끈을 확인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너무 늘어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방끈을 몇 번이나 조이려 했지만, 그때마다 금세 풀어져 아래로 늘어졌다.
“벗어봐, 내가 해줄게.”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가 바닥에 앉은 채 끈을 조일 동안 나는 캐비닛을 살펴봤다. 캐비닛은 중앙에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호스트가 말했듯이 침대에 따라 칸이 나뉜 듯했다. 그러면 위쪽에 놓인 검은색 가방이 산의 여행 가방일 것이었다. 그의 가방은 내 것보다 훨씬 작았다. 대충 봐도 내 가방의 반은 되나 싶은 가방에 여행용품이 다 들어갈까 싶었다.
“다 끝났어. 비밀번호는 6007이야.”
그는 내 등 뒤에서 팔을 뻗어 가방을 넣으며 말했다. 그는 손가락처럼 팔도 길었다.
“너는 여행 가본 적 있니?”
이 애가 내게 말을 걸어줬으니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침대로 돌아가려는 그를 불러세워 말했다. 그는 나의 질문에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내가 준비한 인사말은 여기까지였다. 침묵을 깨고 그는 침대에서 종이 팜플렛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카를교, 카프카 생가, 프라하성, 다 여기 근처니까 택시도 쉽게 잡힐 거야. 근처에 쿠엔틴 프라하호텔이 있으니까 못 알아들으면 거기로 가달라고 하면 되고.”
팜플렛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진홍색 배경에 겨우 보일 듯한 크기의 건물 그림이 있고 그 옆에는 더 작은 글자가 검은색으로 쓰여 있었다. 알파벳과 비슷한 글자들이 쓰여 있었지만, 영어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영어밖에 없는데. 이 지도 하나로 여행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지도를 건네받은 내 반응을 살피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랑 여행 같이 다닐래?”
나는 그를 쳐다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그 문장이 내가 준비하지 않은 채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렇게 그와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폭설이 내리기 5일 전이었다.
<1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