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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담 Mar 31. 2023

할머니는 늘 주방에 계셨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경험했을, 어려운 삶을 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70년을 넘게 살아낸 인간. 나의 할머니는 올해 치매 2년 차에 접어드셨다. 다행히 증상이 아직 심하진 않지만 가끔 사소한 것을 깜빡깜빡하신다. 빈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두었다가 태우기도 하시고 냉장고 속 재료의 위치를 종종 까먹으신다. 긴 세월을 굳세게 견뎌온 탓인지 말에 다정함보다는 고집스러움이 묻어나고, 누군가를 걱정할 때는 위로 대신 화부터 내신다.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정의하고 정리해서 상대가 받아들이기 편한 형태로 만드는 것도 누군가에겐 어려운 일이다. 그녀가 70년 동안 듣고 봐온 모든 것이 곧 그녀의 신념이 되었다. 그녀가 살아온 삶이 곧 지금의 그녀인 것이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먼 강원도 산골로 시집을 갔다. 18살의 나이에 첫 아이를 가졌고 결혼생활 20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여 5남매를 홀로 키우셨다. 글을 몰라 늦은 나이에 한글학교를 다니며 이제야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자신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그녀의 삶에는 '그녀'가 별로 없다. 자식들의 기분이 곧 그녀의 기분이 된다. 자신의 약은 설렁설렁 챙겨드시면서 자식의 아프다는 투정 하나에는 온종일 안절부절못하신다. 기억이 지워지는 와중에도 자식을 위한 기도는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다. '옴바라'로 시작하는 30자가 훌쩍 넘는 불경 기도문이 있는데 의미 없는 글자들이 나열된 것이라 나도 외우지 못한 것이다. 할머니는 이 기도문을 눈 감고도 읊으신다.


그녀의 사랑은 대체로 3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걱정, 기도 그리고 요리.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확실하게 와닿는 방식의 사랑만을 반복하기 마련인데, 여성이 집 안에 유폐되고 부엌에 머무는 것이 당연한 시대를 살아온 그녀에게는 ‘요리’가 자신만의 사랑 방식인 듯하다. 가족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 당연시되고 하나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때에 어머니들의 하루는 대부분 부엌에서 이루어졌다. 그녀에게 자식들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이제 삶의 일부를 넘어서 평생을 걸쳐 해온 ‘사랑’이다. 묵묵히 칼질을 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히 울컥한다.


할머니는 자식들과 손주가 집에 오는 날이면 새벽부터 장을 보신다. 탕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자잘한 반찬을 만드신다. 부러질 듯 차려진 식탁 위에 정작 그녀가 좋아해서 만들어진 음식은 하나도 없다.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를 도맡아 하신다. 자식들이 아무리 말려도 자신의 주방은 자신이 관리하는 게 편하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3평도 안 되는 주방은 이제 그녀의 삶의 고유한 영역이, 더 나아가 일종의 성역이 되어버렸다. 나는 오랫동안 이 사랑 방식이 아주 부당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나는 무한한 감사함과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며 그녀의 사랑을 찬미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사랑의 방식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모양의 사랑은 적어도 그녀의 세대에서 끝났으면 한다. 아버지들도 마찬가지다. 가족과의 소통이 단절된 채 바깥에서 고단하게 살아내는 삶이 절대적인 사랑의 방식이어선 안된다. 자신을 지워나가며 상대에게 쏟는 사랑은 분명 위대하지만 한 인간의 삶을 들여다봤을 때 백번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사회의 모습과 주된 삶의 양식에 따라 사랑의 모습도 달라진다. 이런 사회이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사랑 방식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제한적인 사랑의 방법들을 아낌없이 실천하고 수행하며 여기까지 흘러왔다. 언젠가부터 부모는 희생과 내리사랑으로 삶의 의미를 완성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부모는 원래 그런 존재니까’라는 암묵적 합의와 거기서 비롯되는 안도감은 건강하게 사랑이 전달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멈추게 한다.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시대에 완성된 사랑의 형태와 가족상에 대해 다시 고민해봐야 할 때다. 뻔한 말이지만, 사랑은 소통과 이해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서로를 향한 마음과 말이 진정으로 가닿을 때, 그때 진정한 가족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정형화된 역할과 미덕으로 치부되는 희생에 자족해서는 안 된다. 이제 할머니가 주방에서 나오셨으면 좋겠다. 주방이 아닌 식탁에서 사랑의 언어를 함께 주고받으셨으면 한다. 분명 식탁 위 사랑이 주는 포만감이 더 클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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