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담 Apr 26. 2023

사랑을 다짐하게 하는 장면들

한여름의 카파도키아

관광객을 위한 숙소와 편의 시설이 모여있는 괴레메 마을을 제외하고, 카파도키아의 대부분의 관광 명소는 곳곳에 흩어져 있다. 고민 끝에 ‘그린투어’라는 한국인 버스 투어를 신청했다. 평소 걸음이 머무는 대로 속도를 조절해 가며 여행하는 편이라 단체 여행을 선호하지 않지만, 워낙 넓은 지역인 데다 교통 인프라가 부족한 탓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값진 선택이었다. 단체 투어가 적합한 여행지라는 점에서 오는 편리함과 만족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린투어에서 만난 사람들
버스 안에서 즐기는 카파도키아 풍경

이른 아침, 20명의 한국인들이 괴레메 버스 터미널 앞으로 모였다. 대가족부터 신혼부부까지 다양한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0살 남짓의 아이들도 여럿 보였다. 외국에서 만난 한국인들이 주는 안정감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특히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됐다. 튀르키예인 가이드마저 한국어로 유창하게 창 밖 풍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감탄사도 한국어라니, 모국어로 가득 들어찬 버스 안이 혼자 머문 숙소보다 편안하게 느껴졌다. 새삼 같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국가가 왜 필요한지 알 것만 같았다.



괴레메 파노라마



부모의 언어
셀레메 수도원의 전경

카파도키아의 장엄한 풍경만큼이나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건 다른 가족들이었다.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가 이 순간을 어떻게 함께 보내고 있는지 지켜보는 게 좋았다. 꼭 10년 전의 나의 가족이 생각나서 더 그랬다. (주말마다 여행을 다녔던 우리 가족도 시티 투어를 애용하곤 했다.)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에 압도된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는 그의 어깨에 입 맞추는 한 엄마의 다정함 같은 게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이 세계를 설명하는 부모의 따뜻한 언어를 듣고 있는 것도 좋았다.



달리는 아이들
으흘라라 계곡의 구석구석

투어의 마지막 코스인 으흘라라 계곡을 따라 걸을 때였다. 하루 종일 흙먼지를 마시며 걸어 다닌 탓에 나의 움직임은 무척 굼떠 있었다. 반면 아이들은 지칠 줄을 몰랐다. 뙤약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쉴 새 없이 여기저기를 누볐다. 어느새 친해진 각 가정의 아이들은 시합이라도 하듯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유년기 시절의 내가 덩달아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 아이도 마주한 세상이 한없이 넓게 느껴져 열심히 쏘다니곤 했을 거다.


달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중심을 잃고 넘어질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여린 다리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 건가 싶다. 위태롭지만 힘차게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 시선이 머물자 그제야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런 나를 늘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을 나의 부모님 말이다. 낯선 공간을 헤쳐나가는 아이의 발걸음에 묻어 나는 설렘, 그런 아이가 행여 넘어질까 빠르게 뒤따라가는 부모의 발걸음에 묻어 나는 사랑. 그들이 지나간 자리의 크고 작은 발자국들을 괜스레 꾹꾹 밟아보는 것이었다. 점점 멀어지던 나의 뒷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을 두 사람을 생각하며.


으흘라라 계곡을 따라

느려진 발걸음과 꽤 덤덤한 반응, 그런 나를 지켜보는 이의 부재. 이제 내가 ‘어린이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났음을 자각했다. 그 세계가 너무나 빠르게 끝나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지금의 나도 겁 없이 이 계곡을 따라 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10년 사이에 잔뜩 무거워진 것이 몸인지,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쓸쓸하지만은 않았다. 주어진 풍경을 느린 걸음으로 담는 여유를 가진 어른이 되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일행을 천천히 뒤따라가던 나는 이내 한 부부와 걸음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의 젊음과 에너지에 함께 감탄하며 말이다. 브런치에 올린 첫 기행문에서 이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한 적 있다. 그들은 전 세계를 떠돌며 여행과 일을 병행하는 디지털 노마드 부부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세계 곳곳을 떠도는 삶이라니, 가장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건 그들이 언제나 손을 꼭 잡고 다녔다는 것이다. 부부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여유와 분위기에 마음이 쏠렸다. 여행을 하다가 행복한 순간 중 하나는 바로 이런 ‘멋진 어른’을 만났을 때이다. 그리고 그런 어른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미래의 내 모습도 상상해 보게 된다.


이윽고 먼 훗날, 다시 긴 여행길에 오를 나를 떠올렸다. 아이처럼 달려볼 수 있는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대신 나를 쏙 빼닮은 아이가 힘차게 내 앞에서 뛰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사랑 어린 눈으로 뒤따라가는 무거운 어른이 되어있겠지. 단 한 번도 엄마가 되는 걸 꿈꿔본 적 없는 내가 내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을 그려보는 그 순간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으흘라라 계곡에서 말이다. 기분 좋은 상상을 이어갔다.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갈 사람도 옆자리에 그려 넣었다. 그러나 몇 번을 뒤돌아봐도 내 뒤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신에 내 옆에, 내 앞에 있을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할 사랑들을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그린투어에서 보고 담은 카파도키아의 이국적인 풍경

하루를 몽땅 같이 보낸 가족들이 보여준 화목함과 다정함이 마음속 깊은 무언가를 건드린 듯했다. 덕분에 잊고 지내던 사랑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잔뜩 보고 담은 덕분에 실천하고 싶은 사랑이 생겼다고도 할 수 있겠다. 투어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여행은 어땠냐는 가이드의 물음에 ‘한 번도 바란 적 없던 것을 바라게 됐다’고 속으로 답했다. 그 여행의 모든 순간을 지내고 보니 어떤 가족을 꿈꾸게 됐다고, 여행이 자꾸만 새로운 것을 마주하게 하고 꿈꾸게 한다고.



그리고 엄마의 회신




매거진의 이전글 그렇게 겁쟁이의 여행은 계속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