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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담 May 11. 2023

너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게

맥주1L와 올리버

해가 영영 저물지 않을 것 같던 옥토버페스트에도 밤이 찾아왔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호프브로이 텐트였다. J와 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앉을 곳을 찾아 한참을 헤맸다. 30분 넘게 돌아다니고 나서야 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꽤나 좁은 공간이었지만 배가 고프고 피곤한 나머지 우리는 그걸 빈자리라고 우겨볼 셈이었다. “물론이지! 여기 앉아!”,  우려와 달리 테이블에 있던 한 남자가 웃으면서 우릴 반겼다. 짙은 쌍꺼풀에 파란색 눈동자와 갈색 머리. 영어에서 독일어 악센트가 잔뜩 묻어나던 독일인 청년, 그의 이름은 ‘올리버’였다.


현재 뮌헨에 살고 있는 그는 친구들과 함께 3년 만에 열린 축제를 즐기러 왔다고 했다. 옆에 있던 서너 명의 길고 마른 남자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우리 테이블에는 올리버 일행 외에도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세계 일주를 하고 있다는 호주인 2명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와 J를 소개할 차례였다. 우리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친구, 그리고 아마추어 극단에서 배우와 연출로 일했던 사이라고 답했다. 올리버는 자신도 현재 작은 뮤지컬 컴퍼니에서 일하고 있다며 반가워했다. 그는 내가 맥주 한 모금을 넘기기가 무섭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너의 인생에 대해 얘기해 줘”, “앞으로의 계획은 뭐야?”, “너의 취미는 뭐야?” 맥주를 마시러 간 뮌헨에서 내 23년 인생을 되돌아보게 될 줄은 몰랐다.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온 낯선 이를 이토록 궁금해하는 그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 삶의 단편들을 횡설수설 늘어놓으면 그는 아주 흥미롭고 대단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 마냥 표정을 지었다. 올리버는 내가 꿈을 얘기하는 대목에서 눈을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아냐고 물었다.


“너 정말 영리(clever) 한 아이구나!” 하고 그는 웃었다. 칭찬을 들으면 부정부터 하고 보는 한국에서의 언어 습관은 뮌헨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사용하는 언어가 영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에이, 아니야…” 나의 부끄럼 섞인 대답에 그는 가뜩이나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이어지는 나의 부정의 말을 잘랐다. “이봐 다연! 넌 영리해! 빨리 말해봐. 난 영리하다!” 그의 귀여운 반응을 그저 웃어넘기다가 계속되는 재촉에 못 이겨 중얼거렸다.

“ㄴ.. 난 영리하다…”

“소리가 너무 작잖아!!! 나는 존X 영리하다!!!!”


“나는… 존…. 영… 하다….”

“다연! 이렇게! 나는 존X 영리하다!!!”


“응…. 나는 존X… 영리하다!!!!!!!!!!”

(I'm fxxcking clever!!!!!!!!)

외치고 보니 꼭 그런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옥토버페스트 한복판에서 나조차 미심쩍어하는 내 영리함에 대해 외치는 독일인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J가 찍어준 올리버와 나

Ein Prosit der Gemütlichkeit (아인 프로지트 데어 게뮈틀리히카이트/독일에서 건배할 때 부르는 노래)가 흘러나올 때마다 내 옆의 독일인들은 테이블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흥에 겨워 쿵쿵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테이블에서 학센을 먹어야 했다. 한가득 남은 맥주도 힘겹게 마시고 있었다. 여기는 맥주 1인분을 시키면 1L가 나온다. 올리버와 친구들은 벌써 두 잔 째 비우고 있었다. 그것도 시중 맥주보다 도수가 더 높은 축제용 맥주를 말이다.


거대한 학센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과 다른 텐트로 이동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우리의 새로운 일행은 놀이기구 조명 아래에서 틈만 나면 춤을 췄다. 나와 J는 차마 그 사이에 끼지 못하고 한 발짝 떨어져 허허 웃을 뿐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호러 놀이기구(독일판 귀신의 집)도 타고, 부스도 구경하며 축제장 곳곳을 누볐다. 나의 동행이었던 J는 내내 빨간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친구 옆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남자가 J의 곁을 계속 맴돌았다. 아무래도 J가 무척 마음에 든 듯했다. (아, 참고로 J도 남자다.)


J는 그 청년이 자신에게 “I love you. you’re beautiful”(널 좋아해. 넌 참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며 혼란스러워했다. 장난 반 진담 반의 농담이었겠지만 아무래도 당황스러운 전개였다. “저 친구가 호러 놀이기구를 탈 때 내 옆자리에 앉더라고, 타는 내내 자기가 날 지켜주겠대. 무서워하지 말래. 근데 난 쟤가 지금 제일 무서운데요... 자꾸… 사랑한대… 날…나 어떡하지...?” 나는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쉽게도 그날 밤 빨간 체크무늬 셔츠 청년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리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금방 숙소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는 못 볼 사람들이라서 헤어지기 싫은 마음에 발을 떼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리운 얼굴들

이만 가봐야겠다는 말을 전하자 한 명씩 나와서 우리를 꼭 안아주었다. 그러곤 “고맙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그들과 주고받은 마지막 한 마디는 ‘잘 가’가 아니라 ‘고마워’였다. “오늘 밤, 우리와 함께 해줘서 고마워”호주에서 온 엠마가 나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이윽고 올리버와 작별할 차례였다. 어떤 SNS도 하지 않던 올리버와는 그 순간이 정말 마지막 순간이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안녕을 묻고, 기분을 살필 수 있는 마지막 순간. "다.. 양? 다용? 다 영!?” 그는 내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싶다며 재차 확인했다. 그날 밤, 우리에게 남은 건 서로의 이름뿐이다.


미래의 나에게 이 밤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도미토리에 도착하자마자 졸음을 이겨내며 메모장을 켰다.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되거나 미화되기 마련인데, 올리버의 마지막 인사는 바로 적어둔 덕에 정확하게 남아있다. 그의 다정함과 따뜻함도 함께. 올리버는 거대한 몸집으로 나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다연, 너는 정말 강하고 멋진 아이야.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너를 만나 너무 즐거웠어.

너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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