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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담 May 29. 2023

74명의 외국인 친구들과 떠난 모로코

등장인물을 소개합니다

지난해 10월, 나는 모로코로 떠났다. 13개국에서 온 74명의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아프리카'라는 가뜩이나 낯선 곳을 낯선 이들과 함께 누볐다. 제각각의 이유로 모로코 땅을 밟게 된 우리는 국적과 언어를 불문하고 서로에게 귀하고 특별한 장면들을 선물했다. 와르자자트에서 극심한 갈증으로 지쳐있던 나에게 물병을 건네던 독일인, 사진 찍는 것에 정신이 팔려 발을 헛디딘 나를 구해준 폴란드인, 추위에 떨고 있는 나를 위해 자신의 담요를 양보해 준 이탈리아인, 사막 한복판에서 살사 춤을 가르쳐 추던 스페인 친구 등등. 어쩌면 이 친구들이 내 모로코 여행의 전부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여행 내내 새로운 결의 즐거움과 해방감을 느끼곤 했는데 모두 이들과 함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들의 다채로운 영어 악센트와 표정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조금이라도 희미해지기 전에 함께한 순간들을 정갈히 기록해 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막 그 첫 문단을 써 내려가고 있다.

그리운 얼굴들

파리에서 학교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을 즈음 ERASMUS(유럽 연합에 속한 나라들 사이의 교환학생 프로그램) 스페인 지부에서 모로코 투어 참가자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대상은 유럽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다국적 학생들이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꼭 가고 싶은 나라가 모로코였던 데다 혼자 여행하기엔 겁이 나던 곳이므로 갑자기 완벽한 선택지가 주어진 셈이었다. 게다가 4박 5일 일정의 투어비용이 한화로 32만 원이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투어 확정 메일을 받고 서둘러 마라케시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나중에 메신저 단체방에 초대되고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함께 할 74명의 학생들 중에 한국인, 아니 아시아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겁이 났다. 생애 첫 아프리카 여행을 외국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하게 됐으니 말이다. 그들 사이에서 유일한 나의 국적과 생김새가 하나의 변수로 작용할 것 같다는 느낌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여행 내내 느끼게 될 것이 ‘소외감’ 일지, ‘특별함’ 일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남다른' 여행을 하게 될 거라는 건 분명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더운 공기가 몸을 에워쌌다. 10월의 파리와는 완전히 다른 날씨에 입고 있던 외투를 서둘러 벗어야 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텁텁하고도 미적지근한 공기가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토록 쨍한 햇볕도 처음이었다. 태양은 놀라울 정도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 속 "태양빛 때문에 못 견딜 정도로 괴로웠다"라는 구절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 소설의 배경도 북아프리카의 알제리다.) 사방에 들어찬 아랍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그 아래에 작게 쓰여있는 영어 문구를 쫓으며 출구로 향했다. 아랍어에 완전히 무지한 나는 표지판 속 글자들이 일종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낯선 기호가 가득해서 공항에 있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늘 유럽 안에서 쉽게 국경을 넘다가 깐깐한 입국 심사 과정을 거치자 그제야 내가 정말 머나먼 곳으로 떠나왔음을 실감했다.

마라케시 공항

집결 장소에 도착하자 투어의 리더인 스페인 남학생이 나를 보더니 바로 “다… 연?”이라고 물었다. 아무래도 신청자 중에 내가 가장 ‘다연’처럼 생겼을 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환영한다고 했다. 그는 여행 중 주의사항을 빠르게 전달하고는 이미 도착해서 모여있는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대충 90개의 알록달록한 눈이 나를 향했다. 낯선 이들이 주는 위압감에 순간 움츠러든 나는 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나의 "Hi"보다 훨씬 쾌활하고 여유 넘치는 "Hi"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멕시코, 포르투갈, 미국 등 이들의 국적은 생각보다 더 다양했다. 스페인 지부에서 운영하는 투어라 그런지 모두 이베리아 반도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를 '파리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는 한국인'이라고 소개하니 다들 색다른 설정값의 게임 캐릭터를 만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파리?", "한국인?"이라고 되묻는 친구들의 관심이 어색해서 수줍게 긍정하고는 애꿎은 공항 간판만 연신 쳐다볼 뿐이었다.


나의 긴장을 풀어준 건 옆에 서있던 2명의 폴란드인과 3명의 독일인이었다. 모니카, 안나, 나탈리, 펠리, 그리고 마르셀리나. 그들은 나의 긴장을 곧바로 읽어내고는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때의 첫 만남을 시작으로 이 친구들과의 인연은 여행 내내 계속되었다. 마라케시는 너무 덥다며 우스꽝스럽게 혀를 내밀어 보이던 나탈리,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잔뜩 붉어진 얼굴로 껄껄 웃는 친구들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들과 함께 모로코를 여행하게 된 건 행운이라는 것을. 이제 막 시작된 이 여행이 기대 이상으로 다채롭고 즐거울 것임을. 나란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금발 머리들 너머로 마라케시의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75명 속 유일한 한국인의 모로코 여행이 시작되었다.

잊을 수 없는 마라케시의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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