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다르게 사랑하고 살아가지만
<우리들의 블루스>가 '동석과 옥동'의 이야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살아있는 우리 모두 행복하라'를 외치던 드라마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할 자격이 있는지 보여줬다. 들여다보면 마냥 미운 사람 하나 없다고, 겉보기에 이해되지 않던 인간들도 결국은 다 그럴만한 이유 하나씩 안고 살아간다고. 이 드라마에는 처음부터 마음이 가고 이해되는 인물이 별로 없다. 그러나 회차가 하나씩 방영될 때마다 우리는 푸릉 마을의 사람들을 마음속에 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우리네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죄다 그럴싸한 사연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에게 불호의 책임을 물으려면 그 사람이 감당해온 사건들부터 살펴봐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순간에 휘말렸느냐에 따라 그의 모양새는 크게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물주머니처럼 부풀어올라 슬픔을 잔뜩 머금은 채 터질듯 아슬아슬하게 살아낸다. 또 어떤 사람은 잔뜩 깎이고 날카로워져서 모진 마음과 말들로 무언가를 할퀴며 살아간다. 이를테면 마음대로 굴러가지 못하는, 힘차게 굴러도 결국은 얼마 못가 멈추게 되는 세모의 삶이랄까. 동석은 꼭 그런 세모를 닮았다.
동석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노를 잔뜩 머금고 산다. 화가 나면 참지 않고 꼭 분출한다. 늘 거침없고 날 서있는 모습이 왜인지 슬퍼 보인다. 그 분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동석의 엄마, 옥동이었다. 남편과 딸이 사고로 죽자 옥동은 동석을 데리고 부잣집으로 들어가 첩살이를 한다. 동석은 그곳 자식들에게 매일 맞으며 지낸다. 옥동은 모든 것을 목격하고도 동석을 외면한다. 과거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사람들은 동석에게 이입한다. 엄마의 전화 한 통에도 팔짝 뛰던 동석의 마음에 어떤 응어리가 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고,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원망이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를 향해있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 동석의 시간은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간절히 원했던 고등학생 때에 멈춰있었다. 나 역시 평생을 자식이었기 때문에 끝내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옥동(김혜자)의 마음을 처음엔 헤아리지 못했다. 그러나 옥동의 과거를 알게 되자 비로소 그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의 모양은 대물림된다. 우리는 우리가 받는 사랑의 모양으로 사랑을 정의하고 익힌다. 자신이 사랑받았던 대로 타인을 사랑한다. 결국 사랑도 어떻게 보면 학습의 영역이다. 고귀하고 분명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상대에게 가닿을 거라 생각하지만, 배우지 않고서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옥동은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평생을 가난과 싸우며 살았다. 그런 그녀에게 그녀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생겼을 때, 그녀가 가장 해주고 싶은 것은 자신의 결핍인 '가난'을 물려주지 않는 것이었을 거다. 자신이 느꼈던 불행과 고통을 자식이 겪지 않게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중요한 임무였을 테다.
그러다 가장인 남편이 죽고, 바다로 보낸 딸이 물질을 하다 죽었다. 자식을 생계에 뛰어들게 한 스스로를 저주했다. 평생을 그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그녀가 "종오네 집 가지 말자. 내가 돈 벌어 올게. 육지 가서 일해서 엄마 먹여 살릴게"라며 울부짖는 동석의 뺨을 때린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자식이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일어나서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오랜 시간 믿어왔으니 말이다.
그녀의 인생의 몇 안 되는 사랑의 조각들을 합쳐보니 그녀는 자신이 동석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돈 걱정 없이 머물 곳을 마련하는 것. 동석이 동이(딸)처럼 생계를 위해 일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것. 그녀가 알게 된 사랑의 모양은 그런 것이었다. 옥동이 종오네 집으로 들어간 이유는 배운 것 없는 그녀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부모의 품을 겪어본 적 없는 옥동은 몰랐다. 동석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것을. 하물며 자신의 품을 내어주는 방법은 물론,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자신을 내버리면 얻을 수 있는 돈과 집이 동석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옥동은 동석이 남편이 잘해줬냐고 묻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그럼 무엇을 해주었냐고 묻는 질문에는 '이렇게 짜장면을 사줬지'라고 답한다. 그녀에게는 고작 그런 것도 사랑이었다.
옥동과 여러 대화를 나눈 후에야 동석은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엄마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는지 알게 되자 더 이상 그녀를 미워할 수 없다. 여자 그리고 엄마로서 불행했던, 가죽만 남은 한 인간의 삶을 마주하게 되자 동석의 분노는 속절없이 무너진다. 어머니의 사랑을 아주 잠시라도 느끼게 되는 순간이면 날 선 마음도 맥없이 풀려 버린다. 만물상으로 섬에 들어가서 동네 아주머니들의 부탁이라는 부탁은 다 들어주던 동석, 그는 '엄마'라는 존재를 평생 그리워하며 산 것이다. 엄마를 이해할 수 있기를, 엄마의 곁에 편하게 이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마침내 옥동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깨닫고 오랜 원망을 멈춘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 정답이 어디 있겠냐만은 다른 사랑보다 더 잘 보이고 느껴지는 사랑이 있다. 동시에 잘 드러나지 않고 쉽게 느껴지지 않는 사랑도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받은 사랑이었을, 사랑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모방하며 사랑한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개의 사랑 방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하루가 이토록 시끌벅적한가 보다.
어쩌면 우리 생애 가장 큰 고통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잃는 것이 두려운 것도, 누군가가 떠나는 것이 슬픈 것도 모두 사랑했기 때문이다. 가끔은 누군가가 자신을 끔찍히 사랑한다는 사실이 뻐근한 통증 마냥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대체로 부모의 사랑이 그렇다. 부모의 내리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도 강렬하고 위대하다. 그들은 늘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한다. 자기 자신보다 더 걱정스럽고 애틋한 존재가 있는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모두가 그러했듯 나는 때때로 부모님을 원망하곤 했다. 그들이 내게 표현한 사랑이 간혹 나를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 모든 것이 그들의 최선이었음을, 감히 상상조차 못 할 크기의 사랑을 그들이 아는 사랑의 모양으로 아낌없이 주고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