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내 이야기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유주공은 자기 이익 챙기는 데 약삭빠른 인물이다. 그는 말한다. “유학을 배우는 것이 경세제민하기 위해서겠습니까? 죄다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 하니 우선 과거 시험으로 한번 걸러내는 것이지요. 다 공염불이고 말고요. 아니라면 조선 천지에 유학자가 가득한데 세상이 공자 왈 맹자 왈 대로 흘러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붕당(朋黨)도 자기들만 더 잘되겠다고 만든 것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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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에야 조금 임금다워진 이유는 이괄의 난 때문입니다. 이괄의 난은 인조가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터졌습니다. 그는 반정 공신이자 당대 최고 무장이었습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였던 그는 역시 당대 최고 무장인 정충신과 전투를 치르고도 단 십여 일만에 한양을 점령했습니다. 마치 이후에 닥칠 호란을 떠올리게 할 만큼 빠른 속전속결이었습니다.
인조는 이 일로 호되게 데었던 모양입니다. 이 일에 대한 대책이 두 번의 호란을 역사상 가장 처참한 패배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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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여파로 조정은 각 부대를 감시하는 기찰(譏察, 감시, 사찰)을 강화했습니다. 부대에서 훈련하고자 병사를 움직이면 꼬치꼬치 캐묻고 나쁜 의도가 없음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병사들은 난이 실패로 돌아간 뒤 대거 후금에 투항했습니다. 제국의 시작이 그렇듯 후금도 재주만 있다면 지위고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누구든 받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두 번의 호란에서 북방의 방어선을 피해 한양으로 곧바로 들이닥치는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존명배청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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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인조가 우물쭈물하다가 강화도로 못 가고 남한산성에 갇히고 만 것입니다. 전격전이었던 정묘호란을 겪고도 왜 서두르지 않았는지 저는 의문이었습니다.
이괄은 흥안군(興安君, 선조의 10번째 왕자)을 왕으로 세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난은 실패했고 흥안군은 창덕궁 돈화문에 목이 매달려 죽습니다. 왕의 명령이 있었던 것도, 조사를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반정 공신이었던 심기원이 멋대로 잡아 죽인 것이었습니다.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돈화문에 매달린 흥안군을 본 인조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일개 신하가 왕족을 효시(梟示) 하다니. 그러니 기찰(譏察, 감시, 사찰)과 조정에서 보이는 인조의 바보 같은 행동은 두려움 탓이지 않았을까요?
제 이야기에서 신하들을 의심하고 두려워한 인조는 병자호란의 갈림길에서 남한산성을 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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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의 모든 설정과 사람 간의 관계 그리고 대사 역시 모두 현실의 반영입니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그리고 사극 자체도 이런 현실의 공통된 바탕이 없다면 즐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극을 쓰는 이유 역시 현실의 어떤 현상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인조 시기는 동아시아의 패권이 바뀌는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조선은 명분만 앞세울 뿐 내실은 제대로 다지지 못했습니다. 역모도 유난히 많았습니다. 뒤집어 보면 현실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자 대안의 모색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조선을 바꾸려는 강력한 반작용으로 보였습니다. 제 이야기 역시 이 시기의 역모를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