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rld of Love
<세계의 주인>의 주인공 이름은 “이주인”이다. 제목이 먼저 떠올랐을까, 주인공 이름이 먼저 떠올랐을까? 이 영화의 제목을 떠올렸을 때, 감독은 빙긋이 웃었을까? 이 영화는 왜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을 가지게 됐을까? 그리고 어째서 이 제목은 이토록 사랑스러울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새삼스레 “영화란 무엇일까?”하는 상념에 젖어 길을 걸었다. 영화관 앞에서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곧게 뻗은 길이 있다. 양쪽에 나란히 서 있는 키 큰 나무는 사계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아름다움을 뽐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새삼 낙엽으로 화사한 이 길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정말 2025년 최고의 작품이구나. 누구나 이 영화를 본다면 “어쩔 수가 없다.” 분명히 <세계의 주인>이 올해 최고의 영화라 생각할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도발적이게도 고등학생 커플이 키스하는 장면부터 떡-하니 등장한다. 여고생 이주인은 고3이고 한 달이 멀다 하고 남자친구가 바뀌는 중이다. 게다가 체육 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넘치는 에너지를 어쩌지 못하는 혈기방장한 소녀다. 특별할 것 없는 그녀의 일상에 작은 사건이 생긴다. 같은 반 친구 수호가 성범죄자에 대한 서명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주인은 서명운동에 적힌 문장을 문제 삼는다. “성폭행은 영혼이 파괴되고 정상적인 삶을 더 이상 이어 나갈 수 없게 한다.”라는 종류의 문장 때문이었다.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지고 그녀는 의문의 쪽지를 받는다. “진짜 너의 정체가 뭐야?”
영화에는 내게 인상적인 세 개의 시퀀스가 있다. 첫 번째는 봉사 모임에 주인이가 남자친구를 데리고 온 것을 두고 한미도가 난리 칠 때이다. 그녀는 이 모임의 원칙이 낯선 사람을 데려올 때는 하루 전에 통보하고 허락받는다는 규칙이 있다고 말한다. 봉사활동에 손이 하나 더 많아지는 것을 마다할 일인가 싶었던 나는 미도의 행동이 너무 지나치고 위협적이었다. 그저 천방지축인 여고생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던 영화는 여기서 첫 번째 세상의 균열을 보여준다. 내가 보지 못했던 어떤 세계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미도의 진실은 이후로도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나서야 일부를 보여준다. 이 모임은 단순한 봉사활동 모임이 아니었다. 피해자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세차장 장면이다, 한바탕 학교에서의 소란이 벌어진 뒤 엄마와 딸은 차를 타고 말없이 밤 드라이브를 한다. 그리고 자동차 세차장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주인은 엄마에게 원망을 쏟아낸다. 조금만 더 지켜봐 주지, 엄마잖아. 엄마니까 보고 있어야지. 몸부림치며 운다. 늘 기운차던 여고생 주인이 처음으로 속내를 드러낸다. 울부짖는 딸을 말없이 내버려 두던 엄마는 무심히 물을 건네고 티슈를 준다. 고통의 시간을 같이 통과하는 가족의 마음이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되는 놀라운 장면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영화 마지막의 쪽지다. 감독은 이 마지막 쪽지를 통해 관객에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또 한 명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고.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제목이 너무 사랑스러워 마음이 아팠다. 쪽지 하나에서 연결되는 이 씬의 컷들은 이 영화를 최고의 영화로 만든다. 이 씬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내게 엄청나게 많은 여운을 남겼다. (하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까지)
영화는 정말 꼼꼼하게 잘 설계되어 있다. 눈부신 대본이었다. 주인의 동생 해인은 마술을 한다. 고민과 근심이 정말 마법처럼 사라지길 바라는 것이다. 유치원 원장인 엄마는 텀블러에 술을 담아 마시며 슬픔과 고통을 견딘다. 미도는 가장 어려운 것이 “용서”라고 한다. 주인이는 “사과”를 절대 먹지 않고, 두려움을 물리치려는 듯 태권도를 한다. 그리고 말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라고.” 그리고 태권도 관장은 미도의 아픈 기억이 담긴 체육관의 불탄 자국을 지우지 않고 남겨 놓는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주인의 가족들은 모여서 깔깔깔 웃고, 주인의 친구들은 노래방에서 까불며 논다.
우리가 슬픔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가 아픔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니다. 질문이 잘못됐다. 우리가 슬픔을 견디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가 아픔 견디는 방법은 무엇인가? 가 옳은 질문일 것이다. 슬픔과 아픔을 이기는 방법은 없다. 그저 견디고 계속 살아갈 뿐이다. 마치 주인이 수호의 “영혼이 부서지고 삶을 이어 나갈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라는 말에 격렬히 저항하듯. 비록 몸부림치고 울고 원망하고 두려움에 몸서리치지만 견디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이 떠올랐다. 그녀의 소설에서도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거대한 예산의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도 <세계의 주인>처럼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는 흔하지 않다.
영화를 보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 길을 걸었다. 그 길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자 이 길은 더 아름다워 보였다. <세계의 주인>을 보고 알록달록해진 내 마음처럼 알록달록한 낙엽들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렇다 아름다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이 길처럼 늘 있는 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발견은 늘 새로운 관점에서 찾아진다. 그렇게 새로운 관점이 진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그것이 예술의 아름다움이고, 흔한 삶에서 새로운 순간을 포착하는 영화의 아름다운 지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계의 주인>은 아름다웠다.
촬영, 배우들의 연기, 대본, 연출 모두 너무 좋다. 미장센도 근래의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그야말로 영화적이었다. 실재에 가장 가깝고 자연스럽다. 영화를 보며 오랜만에 정말 잘 찍었다는 느낌을 받은 영화였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2025년 최고의 수작(秀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