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Flood, NETFLIX
대홍수는 고대의 문서들에 공통으로 나오는 인류멸망의 사건이다. 성경에도 길가메시, 그리스 신화에도 분노한 신이 대홍수로 인간을 말살하려 한다. 영화 <대홍수>는 그러나 이런 신의 분노와 무관한데도 인류가 리셋 된다는 의미로 “대홍수”라는 제목을 썼다. 때문에 관객들은 대홍수가 사실은 AI 시뮬레이션이라는 설정 전환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제목은 종종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이드 라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홍수>는 카피마저도 “세상이 끝나는 날 인류를 위한 단 하나의 선택”이다. 누구라도 대홍수라는 재난에 맞서는 사투를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전혀 다른 의미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혼란스럽다는 평가가 많은 영화 <대홍수>는 어쩌면 영화의 소재를 정확히 가리키는 다른 제목을 썼다면 평가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아침, 여섯 살 먹은 아들과 사는 주인공 구안나는 집이 잠기는 대홍수를 맞이한다. 물은 계속 차오르고, 사람들의 아비규환 속에 두 사람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아이가 계속 칭얼대는 사이 회사 보안팀 요원이 그녀를 찾는다. 그는 남극에 충돌한 소행성으로 인해 대홍수가 일어나 인류는 끝났다고 말한다. 때문에 신인류를 만들기 위해 구안나가 연구하는 이모션 엔진의 완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대사는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지만 어째서인지 이 장면은 잘 기억되지 못한다. 이 신인류 프로젝트는 지금 당면한 인류 멸절의 대홍수 사태에 비교하면 작은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운동장에서 반 대항 축구를 하는데 갑자기 운동장에 보안요원이 뛰어 들어와 수능에서 1등 해야 하니 당장 교실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 같다. 설사 그 말이 맞는다고 해도 일단 내 앞에 떨어진 공은 차고 봐야 한다. 그러니 당장은 주인공이 이 난리통에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가 더 관심의 대상이 되고 키워드는 잊혀진다.
혹시 이 정보를 마침 잘 새겨들었다고 해도 난관은 또 있다. 이어지는 구안나와 상관이 나누는 대화가 다시 혼란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그녀의 상관은 마치 주인공의 아들이 회사에서 만든 인공생명체라는 식의 언급을 한다. 대홍수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듣는 신인류 개발 계획, 그리고 인공생명체 소년에 대한 언급은 동짓날 팥죽을 먹는데 “사실 너는 괌에서 모히또 먹고 있는 중.”이라는 식의 뜬금없는 소리로 들린다. 작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의 배경에 큰 비밀이 있다는 식으로 보이길 바랐겠지만, 도리어 관객에게는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이상한 소리만 하고 있다고 들렸을 것이 틀림없다. 대홍수라는 소재가 신인류 계획이라는 내용과 어그러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 <13층> <다크 시티> <소스 코드> <토털 리콜> <매트릭스> <오픈 유어 아이즈. (바닐라 스카이)> 등이 내가 <대홍수>를 보고 떠오른 영화들이었다. 현실은 조작되어 있고, 우리는 가상의 공간에 살고 있다는 소재의 이야기들. 이 영화들도 <대홍수>와 같이 자칫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혼란을 줄 수 있는 영화들이다. 어쩌면 지금도 <토털 리콜>의 주인공 퀘이드가 이식받은 기억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이런 겹겹의 현실들은 흔히 최종적으로 현실을 은유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이 사실은 가상 세계라거나, 죽어가는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는 군산복합체의 비정함 같은 것들이 그렇다.
“소행성의 충돌로 인류는 멸망하지만, 이미 인간의 기술은 사람의 신체를 프린트해 낼 수 있는 수준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AI의 올바른 감정이다. 이를 위해 가상현실 속에서 이모션 엔진의 실험을 진행한다. 가상 세계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줄기차게 비가 쏟아지고 아파트에 물이 차 오르는, 인류의 잠재의식 속에 가장 두려운 재난인 대홍수 속에서 미션들을 통과하고 자신의 아이를 지켜야 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바로 <대홍수>다!” 이렇게 대강의 스케치를 생각하고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어 갔을 것이다. 얼핏 기발해 보이는 이런 구조는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 구안나는 완전한 모성애를 구축하기 위해 몇 가지 미션들을 수행하고 완성해야 한다. 엘리베이터에 갇힌 소녀를 구해주고, 임산부를 돕고, 강도를 막는다. 하지만 그 미션들이 어째서 완전한 모성애나 인간성의 구현이 되는지 영화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설사 그것이 적절한 미션이었다고 해도, 어째서 그런 항목이 신인류에게 필요한 것인지 또한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의문이 떠올랐다. 주인공은 이 상황이 어쩐지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반복되는 루프에 빠지면 보통 주인공은 이 루프의 정체를 밝히려 애쓴다. 아들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 비밀을 밝혀야 아들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쪽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주인공은 루프의 정체를 밝히려 하지 않고 엉뚱하게 보안요원들이 아들을 납치했다고 생각하고 총격전을 벌인다.
또 이런 총격전이 번번이 실패하자 어째서인지 이번엔 주인공이 착해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이건 마치 미션을 클리어 해야 다음 단계로 가는 게임을 떠올리게 한다. 이모션 엔진의 완성을 위해서 이런 설정이 들어갔다면 완전히 실패한 설계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대홍수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미션을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아들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을 구하는 사이 아들이 죽을 수도 있는 딜레마를 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에서 내용은 형식을 정의하고, 형식은 내용을 규정 한다. <대홍수>는 신인류를 만들기 위한 시뮬레이션이라는 “내용”과 대홍수 속에서 아들을 구하는 미션 과정에서 인간성을 구축한다는 “형식”이 서로 부합되지 않고 갈등한다. “대홍수”라는 제목은 내용과 어긋나고, 신인류의 감정이 완성되는 과정은 설득력이 없다. 과연 모성애가 신인류의 감정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논란을 제쳐놓아도 여전히 영화 <대홍수>가 혼란스러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