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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존재 Jan 27. 2023

13. 아랫집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사정

작년 12월 초부터였던 것 같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



우리가 사는 이 건물에는 총 네 가구가 살고 있다. 처음 뷰잉을 왔을 때 집 내부도 깨끗하고 좋았지만 건물 내부도 조용해서 마음에 들었다.


더블린을 떠나기 전 2년 넘게 살았던 동네와 아파트가 워낙 조용했고, 이웃들도 좋았기 때문에 포르투갈에 와서도 비슷한 분위기의 동네와 집을 찾았으면 했는데 이 집을 구하고 나서 다행이다 싶었다.


이사와 짐 정리로 정신없이 분주했던 한 주가 지나가고 어떤 사람들이 이곳에 사나 궁금해지던 차, 같은 출입구를 쓰다 보니 오다가다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었는데...


우리 집 앞집에는 우리 아빠 또래처럼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가 혼자 산다.

처음 뷰잉 왔을 때 어쩌다 랜드로드에게 듣게 되었는데 아내 분과 몇 개월 전에 사별하셨다고.


그래서일까. 아저씨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갈 때마다 자신을 반기는 고양이에게 항상 건네는 말이 있는데 포르투갈어라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이쁜이 오늘 하루 잘 보냈어? 아빠 일 갔다 왔어."


이런 말일 것만 같다.

얼굴만 보면 세상 무뚝뚝할 것 같은 아저씨의 목소리에 상냥함과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1층 왼쪽 집에는 우리처럼 외국인 가족이 산다. 아시안인 것 같은데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겠다.

부모와 장성한 자녀들까지 최소 4명 이상이라 오다가다 제일 자주 마주친다.


항상 창문 앞에 빨래가 가득 널려있는데 옷뿐만 아니라 운동화 여러 개도 같이 널려있다.


소나기가 내리는데도 빨래를 걷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집에 아무도 없는 건지, 괘념치 않는 건지 모르겠다.



나머지 한 집이 남았다. 이사한 지 2주가 되어가도 이상하리만치 마주친 적이 없었다.

빨래가 널려진 것도 본 적이 없었다.


12월 초였을까.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던 것이.


성량이 보통이 아닌 포르투갈인 남자의 목소리가 집 사이의 벽을 거뜬히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러 명이 살고 있는 1층 왼쪽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남자의 목소리만 계속 들렸고, 포르투갈어였기 때문에 그 집 일리가 없었다.


알고 보니 그동안 전혀 마주친 적이 없던 1층 오른쪽 집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한번 말을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계속돼서 처음에는 전화 통화를 주로 해야 하는 직업인가 보다 싶었다.


그런데 그의 폭주는 자정이 가까워져도 멈추지 않았다.

약간 화가 난 채로 상대방에게 따지는 듯한 톤과 어조의 목소리는 밤이 돼도 잦아들지 않았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온전한 쉼을 갖는 저녁 9시 이후의 시간을 통째로 빼앗긴 느낌마저 들었다.


그 집에 한 중년 여자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있다.

우리 집 창문 앞에 빨래를 널 수 있는 빨랫줄이 있어서 종종 널어놓는데 수건 하나가 그 집 베란다에 떨어진 것이다.


벨을 누르자 중년 여성이 나왔다.

아이들을 전혀 본 적이 없어서 자녀가 없거나 장성해서 같이 살지 않는 중년 부부가 이 집에 산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그 남자의 목소리는 며칠 동안 계속 들리기도 하고, 또 며칠은 전혀 들리지 않기도 했다.  

이상했다.



12월 말 2주 동안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러 이탈리아에 다녀왔고, 잠시 잊고 있던 그 X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여전했다. 상대방에게 화가 나 따지는 듯한 목소리.

그런데 그 중년 여성의 목소리도 희미하게 같이 들렸다.


남편보다 나는 소리에 더 예민한 편인데 자기 직전 까지도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잠들어야 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당장 내려가서 뭐라도 욱여넣고 입틀막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런데 평소에는 아주 희미하게 들리던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제법 커지고 높아진 것을 느꼈다. 남자도 더 격앙된 듯 보였다.


둘은 싸우고 있었다.


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그때, 집 문을 열고 복도에서 들리는 소리를 녹음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얘기했다.

포르투갈어를 우리가 못하니까 랜드로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받자고.


씩씩대고 있는 나에 비해 남편은 여전히 침착해 보였지만 이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100% 동의했다.



'그 집은 원래 여자 혼자 사는 집이에요.'


랜드로드에게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애초에 그 집은 여성 혼자 사는 집이었고, 그 남자는 몇일씩 들락날락했던 것일 뿐.


생각해 보니 그 남자는 거주자 주차 공간에 한 번도 주차하지 않고 늘 문 앞에 두고 왔다 갔다 했으며, 매일 그 집에 있지도 않았다.


우리는 랜드로드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려는 정도로 문자를 보냈는데 랜드로드가 우리의 문자를 보자마자 그 여자에게 전화로 꽤 세게 항의를 해버려서 일이 예상보다 커져버렸다.


더 충격적인 건 그 여자가 랜드로드에게

'자신은 그 남자에 대해 전혀 모른다.'라고 했다는 것.


혹시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싶어 우리가 녹음했던 파일을 랜드로드에게 보냈다.


자신의 집에 누군가를 들이는 것이 잘못된 일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숨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모르는 그 여자와 그 남자만의 사정이 있을 거다.



어쨌든 평화와 고요함이 다시 찾아왔다.


남편과 얘기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절대 아랫집 베란다에 빨래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자고.


그러고서 아랫집 베란다를 보니 구석에 박혀있는 우리 집 수건 하나...


하...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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