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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데드 Feb 10. 2024

구겨진 쪽지

03]

나는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잠 잘 곳이 옮겨지면 마음은 불편함에 와구 삼켜졌다. 불편함을 덜어내려 정보를 벌 목적으로 우울한 호랑이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당장은 힘들고 불편해도 후에 올 정서의 느긋함이란 보상은 참을 수 없다. 발이 넓어질수록, 남긴 발자국이 늘어날수록 내 신경회로의 깜빡임은 가속되고 밀물같이 밀려오는 정보의 입수가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럴수록 콧노래로 가린 평온함은 완강한 활력을 띠게 되므로, 이따금 뇌를 찌르는 카타르시스에 재차 적응할수록 인위적으로 만든 불편한 생활은 역설적으로 편해져 갔다.


어느덧 집 근처에 도착했다. 맞은편 버스정류장엔 같은 경로를 앞서가다가 신호등을 건넌 교복 입은 여자애가 얌전히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의 '마녀'라고 불리던 친구와 어딘가 닮아있었기에 나는 그녀가 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이어폰 한쪽을 빼며 놀란 표정을 짓더니 때마침 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앉으며 건너편 벤치에 앉은 나를 내리깐 눈으로 흘겨보았다. 저주받은 대저택의 마녀를 감히 넘보지 말라는 듯이. 창가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댄 침울함이 왠지 이리로 전해진 것 같았다. 따스한 햇살이 이마 위로 쏟아지자 그녀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는 그늘에 먹힌 벤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집으로 가려면 골목의 높은 언덕길을 올라가야 했는데 거기서 우연히 어떤 여자를 마주쳤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생글생글 웃던 그녀는 두 손을 뒤로 감춘 채로 가벼이 어깨를 흔들었다.


며칠 전, 나는 동네에 왔을 때에 키가 큰 여자를 보았다. 얼핏 보아도 동갑 같았고 어림잡아 20대 중반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웃음 탓일까? 어리숙한 미소에 더해진 매력. 두어 살은 어려 보였기에 '거꾸로 밴저민'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비밀 많은 고고학자 같았다. 그녀는 언덕에서 갑자기 큰 노란 팩에 담긴 초콜릿과자를 내밀었다. 달콤 짭짤한 소금기와 훈연냄새가 뒤섞인 두툼한 식감의 와클도 아닌 게 바나나킥의 깊은 바나나향 풍미와 달캉한 식감, 초코맛 번지가 위에 덕지덕지 발린 콘초와 같은 군것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침을 질질 흘릴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내민 처음 보는 과자를 덥석 받고 붉은 벽에 기대어 앉았다. 때마침 가방에 홈런볼 같은 과자가 있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자신의 메일이 적힌 쪽지를 손에 쥐어주었다.


꼭 그녀에게 연락하리라고 다짐하자마자 꿈의 틈새가 열려 잠이 깨져버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펜을 붙잡고 기억나는 대로 장소, 상황, 인물의 키워드를 따서 공책에 적었다. 이렇게 해야 금방 사라질 꿈이 선명하게 남는다. 나는 다시 그녀를 보기 위해 눈을 감았다.


노란 단발에 눈웃음이 예뻤던 맑은 피부의 그녀. 어린아이처럼 소심한 그녀. 알다가도 모르겠는...

알듯 말듯한 그녀.


어차피 현실에서는 마주할 일 없겠지. 아무쪼록 그 애가 어디에선가 잘 지냈으면 다. 꿈을 통해 그 동네가 배경인 곳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우리가 만날 수도 있으니까 일말의 기대를 걸어본다. 본능적으로 손이 주머니 속에 빨려 들어갔다.


"가만 보자... 그 쪽지가 어디 갔더라?"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텅 빈 주머니를 후비적거렸다. 나긋한 그녀를 애타게 찾는 길 잃은 아이처럼.



이미지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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