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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데드 Jan 22. 2024

ワライオニ(와라이오니)

02]

"미안합니다. 또 살았습니다."


나는 어깨를 뒤덮은 회색빛 먼지를 털어내며 똑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놀라던지 의아해하는 표정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신기해서 쳐다보는 번뜩이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떻게 설명해도 설득이 되지 않으면 조용히 묻어가던가. 아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진짜가 아니다. 이번에도 나만 진짜인 걸까.


문득 언젠가는 여자친구에게 펜트하우스에서 살 거라는 농담 같은 진담을 내뱉은 적이 있었다. 재앙이 닥쳐오기 전, 혜성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돌덩이가 전 세계를 강타해 대부분의 국가는 괴멸했고,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구조물을 피해 가며 살 길을 찾아갔다. 약탈을 일삼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법과 규칙이 필요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 폐허가 된 더미 속 생존자들을 가까스로 구출했지만 이번 생존자들은... 함께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오, 이런...

이 망할 세상에서...

당신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아직 저를 기억하고 있나요?




그녀는 웃는 얼굴로 나의 손을 잡고 비좁은 골목을 걸었다. 밝은 햇살이 잘 들지 않는 서린 그늘에 한기가 싫었지만 집 밖으로 나가는 게 귀찮은 여자친구는 외출이 오랜만이다. 그녀의 흥얼거림에 홀렸는가 가벼운 산책을 하는 것만으로도 싫었던 아니꼽던 기분은 나아졌다. 우리의 피상적인 일상의 대화는 영원한 구원이었다.


탄환이 머리를 스치듯 떠오른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났다. 

거대한 행성들이 지구를 향해 궤도를 틀었다는 속보였다.


세상이 멸망해도 아마 우린 영원할 거야.


하지만 영원이란 건 옛말이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동네 언덕은 산을 깎아 만들었으므로 굴곡이 굉장히 심했다. 부산 골목보다 경사가 가파른 서울 골목길을 생각하자니 이만해도 다행이었다. 아찔한 고부랑길이 아니라면 덜 울렁거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 발을 디딜 때마다 숨이 차올랐다. 평소에 잘 돌아다니지 않아 그런지 체중이 급격하게 늘었기에 여자친구는 괜히 자기 때문에 힘든 게 아니냐는 걱정을 했었는데, 결국 이것은 나의 문제였다. 그러니 절대로, 절대로 남의 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가 너무 좋으니까 같이 집에 있는 거지. 나 완전 집돌이인 거 알잖아."


그녀는 피식 웃으며 언덕 위에 있는 계단을 밟아 섰다. 어느새 계단을 다 오르자 판잣집이 들이모인 달동네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두 팔을 벌려 기지개를 켜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별로 웃지 못한 요즘 사소한 행복이 가져다주는 보은은 우울한 기분도 낫게 했다.


"숨이 트네, 자긴 좀 괜찮아?"


저녁 해로 물든 그녀의 머리카락이 쌀쌀한 겨울바람에 랑거렸다. 돌아본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사랑스럽있었다. 사랑한다. 네 미소가 좋아. 이렇게 괜찮다고 둘러대볼까.

괜찮다고 답하는 대신 그녀의 코끝을 톡톡 두드리는 버릇이 나왔다. 가만있던 그녀는 다시 동네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녀에게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 했고, 소정의 현금을 챙겨 동네 편의점에 들렀다. 동네에서 자주 보던 친절한 아주머니는 캐시박스를 열어 돈을 정리하고 계셨다. 나는 계산대 앞에 네 개의 과자를 내밀었고 계산을 한 뒤 모든 과자를 앞으로 조금 밀었다. 주머니에 마침 휠체어 바퀴가 있어 그것도 꺼내어 드렸다. (어떻게 소지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주머니에 휠체어 바퀴가 들어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니까) 


"아휴, 뭐 이런 걸 다..."


내가 문을 나섰을 때 아주머니는 미심쩍은 웃음을 지었다.... 기쁜 걸까? 어딘가 꺼림칙했다. 편의점을 나오자 푸르렀던 저녁 하늘이 어두워졌다. 동네 골목 가로변에 호롱불 등이 은은하게 비쳤다. 붉은색으로 얼룩진 얇은 보슬비가 눌러쓴 빗물에 더욱 검어진 모자를 토닥였다. 추위가 더해져 입김이 나왔다. 집으로 가야 했다.

왠지 누군가의 눈길이 느껴졌다. 어두운 골목길은 항상 조심. 내가 살아야 사랑하는 사람을 구할 수 있으니 당장 할 수 있는 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는 거였다.  


나는 편의점 주변 골목을 뛰쳐나와 쫓기는 무언가에 닿지 않으려 애를 썼다. 누구에게 쫓긴 건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무리들은 계속해서 바짝 쫓아왔다. 그러다가 어떤 여자가 보였다. 장발의 노란 머리와 검은 머리가 어우러진 투톤헤어의 포니테일 여성이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 사람이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 틈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이내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시종일관 도망치는 나를 노려보았었기에 아랫길로 뛰어갔다.


편의점으로부터 도망 나온 뒤로 상당히 숨이 벅찼고 밤은 점점 깊어갔다. 달빛과 가로등밝은 덕에 길은 보였다. 도망 끝에 창이 다 비치는 5층짜리 펜트하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층에서는 나체의 남녀가 서로 몸을 뒤섞고 있었고, 그걸 보다가 도망치고 있던 사실을 망각했다.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길이 막혀있어서 바로 왼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둔탁한 발소리가 빨라질수록 여러 개의 발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여전히 누군가가 쫓아오고 있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하지?


발길을 돌린 길 끝이 보였다. 일본식 주택의 집이 보였고 그곳엘 들어갔다. 안쪽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어서 오라고 양쪽에서 문을 열었다. 다락방의 창 없는 문으로 지켜본 문신남이 알려줬으리라. 건물에 들어서자 문신 가득한 머리에 다래(조선시대 왕후의 머리)를 한 아리따운 여인이 똑바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웃으며 겉옷을 벗었다. 이런, 내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든 것일까. 그녀가 풍기는 이상한 기운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숨이 그녀에게 닿으려는 찰나 뚱뚱한 남성이 칼을 들고 이쪽으로 쿵쿵 걸어왔다. 엄습한 두려움에 닫힌 문으로 단숨에 뛰어갔지만 거구의 남성이 어깨로 돌진했다. 나는 오른편 바닥에 내쳐졌고, 분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완벽하게 연마된 날카로운 사시미가 배에 깊숙이 들어왔다. 한번, 두 번, 아니 삼사십 번. 뾰족한 철 때기가 살을 비집고 내장을 찌른 뒤 대각으로 빠질 때마다 토악질 서너 번. 야쿠자로 추정되는 남성들의 표정에서 희열이 비쳤다. 신음과 피가 연신 뿜어져 나왔다. 잉어와 도깨비가 그려진 여러 개의 몸뚱이에 피가 튀었고, 바깥보다 추운 오한으로 극한의 한기가 느껴졌다. 어라. 죽는 건 좋다던데, 꿈에서는.


제1 악몽 <예리한 농담> 끝.


반복되는 죽음.

별다른 걱정 않는 내게 지속되는 죽음은 대체 무슨 의미인 걸까.


그렇다.

다 부질없는 것이다.

삶의 명분과 의미 있는 죽음도.

내가 가진 철학과 신봉하는 불교의 윤회와

전생의 쌓이고 쌓인 다이내믹한 나의 운명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깊은 어둠 속의 도깨비로 놀림받는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이 앞에 있는 나는 무엇일까. 검은 눈과 피부를 가진 아이. <주온>의 토시오와 닮은 아이가 입을 뗀다. 피비린내 나는 붉은 뾰족 너를 드러내며.  


"내가 우는 것이야? 말해."


뚝뚝. 물줄기가 떨어진다. 그의 중압감에 눌려 바닥에 붙은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숨을 쉴 수조차...

처음엔 볼. 둥그스름한 머리를 타고 흘러 안면을 적신 뒤 입에 그 차가움이 닿았다.

서서히 풀려가던 눈이 끝내 감긴다. 물방울이 파동을 일으켜 소리를 퍼뜨릴 때마다 잠은 깊어져간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 또다시 암흑 속에서 되살아났나. 삶과 죽음이 아무 의미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모두 무슨 소용인가...

삶, 그래! 그것이 나의 깊은 악함을 깨운다. 이 꺼지지 않는 불같은 악몽도 결국 한 사람을 쉬이 죽이지 못하는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않은가. 인간의 의지를 꺾는다는 말이지......!


'깨어라, 와라이오니.'


눈을 뜨자 펜트하우스에 딸린 수영장에 발이 담겨 있었다. 물이 얕았고, 수영장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풀장은 작았다. 세면대의 크기였지만 물이 담겨있으니 모형 수영장일까 생각했다. 하얀 대리석으로 된 틀을 보니 그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 물 담긴 그릇이겠지. 발 사이로 가가 휙 지나갔다. 붕어 아니면 잉어?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크기라면 아마 중간 사이즈의 철갑상어나 새끼 아로와나쯤은 되지 않을까. 물고기의 비늘이 아니라 파충류 따위갑각이다. , 악어다. 머리가 아파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정육면체에 얕은 물이 담긴 '초소형 욕조 수영장'이 즐비해 있었다. 모서리를 연결점 삼아 어찌 된 영문인지 닿은 부분이 적었음에도 균형을 유지했고, 수백 개의 욕조는 마치 한 개의 건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만. 야쿠자 집을 들르기 전에 본 그 펜트하우스... 왜 그것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집이 그때 본 펜트하우스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찌 됐건 높은 곳에 있으니 불안했다. 가만히 있다간 악어에게 물릴 수 있으니 최대한 악어다리 쪽으로 발을 디뎠다. 물은 상당히 따뜻했다. 푸른 새벽에 떠 있는 달빛에 반사된 물이 찰랑일 때마다 자신감이 들어 과감히 욕조를 계단처럼 뛰어 내려갔다. 욕조 끝에 발을 디뎌 내려갈 수 있었지만, 반질반질한 대리석이니 미끄러지면 뇌진탕으로 꿈에서 나오지 못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도깨비로 환생한 제2의 악몽에서  체면이 서질 않는다. 욕조를 내려온 후 뒤를 돌아보자 정육면체로 된 욕조들이 서로 조립되어 5층 펜트하우스의 모습을 갖췄다. 크고 작은 악어들은 집의 구조물로 변형되었고 물은 벽면에 스며들어 타일과 화로, 장식품으로 구색을 갖추었다.


"이런데도 저기로 가고 싶다고?"


눈에 붕대를 감은 아이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그 아이는 여전히 정신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살아있고, 나와한 몸이라는 것을. 


"그래, 저 악어들은 내가 겪어온 고통이 형상화된 악몽의 피조물이겠지. 그렇지만 나는 악어가 좋은 걸."


"저것들은 모두 네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어. 게다가 죄책감도 묻어있고. 좋은 집에 산다는 게 대체 겐 무슨 의미인 거야?"


"집이 없는 사람들, 쉴 곳 없이 황량한 사막을 떠도는 사람의 심정을 알아. 그래서 죽음에 초연했던 거지. 좋은 집에 산다는 건..."


나는 펜트하우스로 들어갔다. 2층에서 다이얼 전화기로 누른 번호는 1. 그것은 어릴 때 키 작은 아이를 상징했다. 내가 살았던 보육원은 키를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으므로 벽난로 화롯불 위에 나타난 아이는 아마도 어린 시절의 자신일 것이다.


"악에 받쳐서 고통을 혼자 참으며 사는 건 오래 못 가. 그러니 이 고통을 나와 함께 즐기자고, 도깨비답게 말이야."


내가 물었다.


"도깨비 답다는 게 뭐지?"


"글쎄? 음... 괴인 같다?"


마침내 아이는 웃었다.


제2 악몽 <귀화> 끝.



이미지출처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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