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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데드 Feb 11. 2024

공이 닿는 곳

04 ]


"거기 아저씨! 그 공 이리 주세요!"


체크무늬 옷을 입은 아이가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소리치는 아이를 우두머리로 삼는 다른 아이들도 어서 공을 건네라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붙였다. 나는 잠시 공을 넌지시 바라보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구름이 달빛을 가려 밤눈이 깜깜해지다 슬쩍 보이기를 반복. 음력으로 한 해의 끝 달을 가리키는 섣달. 12월의 손톱달이 뜬 어두운 밤. 청년으로 커가는 아이들이 던진 공에서 노란빛이 새어 나왔다. 새하얀 등에서 연푸른 LED광으로 변경된 아파트 가로등 불이 깜빡이기를 어언 십 분째. 공이 날아든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정적이 잦아든 그 자리에 아이들은 없었다. 단 한 명도.


달은 재생과 부활을 의미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 방금 전에 올려다본 달이라면... 죽음뒤엔 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 아이의 앙칼진 외침은 끊기지 않는 족쇄처럼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앙앙대는 소리가 뜸하다 싶으면 그 사이에 채워진 공허함의 틈새를 겹겹이 쌓인 외침이 기회삼아 헤집곤 했다. 온전한 정신을 떠받치는 무게추를 가볍게 흔들며 조롱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파트의 언덕길을 내려와 거기서 꽤 멀찍이 떨어진 달동네로 향했다. 땅거미가 짙게 깔린 달동네는 맨홀로부터 올라오는 하수구 냄새가 심했다. 거기는 메탄가스가 자욱해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길 꺼려했다. 달동네에는 작은 슈퍼와 문구점이 곳곳에 있었는데 사창가를 지나치면 게슴츠레한 눈과 취한 걸음의 '녹맨'들이 난동을 부렸다. 녹색 술병을 들고 마시며 욕을 거침없이 뱉는 그들의 행색 때문인지, 아이들은 문구 앞의 오락실에서만 볼 수 있는 '록맨 에그제'의 별명을 틀어 갖다 붙여 부르곤 했다. 녹맨의 시야에 잡히지 않으려 코너를 돌 때마다 나는 그들이 있는지 살폈다. 여차하면 취한 칼이 날아들지도 몰라. 위험한 동네는 호신용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이 기본이다. 여차하면 저승을 볼 신세가 될 테니까.


녹맨이 떴다 하면 터지는 잦은 난동의 여파로 동네 장사꾼들은 깡통차기에 달인이 되어갔다. 연휴에도 문을 자주 여닫는 추세가 급격히 올랐지만 사람들은 눈길은커녕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동네가게의 주인장들은 매번 오는 손님을 깎듯이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다섯 손가락 이상을 먹여야 했던 터라 박복한 현실에 슬픔의 독에 빠져 안주할 뿐. 알코올에 의한 사망률은 높아만 갔다. 신문배달부가 흘리고 간 신문에서는 해당 동네의 타살, 피살, 자살의 소식이 빈번했다. 단골과의 연줄이 엷어질수록 동네 어른들의 뾰족하게 길러진 털 주변 입술은 술냄새로 말라갔다. 동네에 다시 갈까 다시 생각해 봐도 멈칫하며 돌아서는 사람들의 발재간에 놀아난 걸까. 슬픈 건지 웃음을 숨기려는 건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가게 옆 쓰레기통을 뒤지는 쥐떼의 부스럭거리는 잡음만이 들려왔다.


제길, 그땐 그저 몸이 내 맘대로 따르지 못했던 것뿐이라고. 공을 던졌던 놈에게 그리 말하고 싶었다. 풀린 다리로 고개를 드는 것조차 버거운데 어찌 정확한 공의 포물선을 녀석들의 가슴팍으로 던지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자신을 믿는 것뿐만이 아니다. 두려움을 상쇄시키는 아찔한 취기의 괴팍함. 영생의 음기를 광범위하고 흘러넘치게 소지한 슬픈 광대의 힘이 필요했다. 지그재그로 떨리는 아찔한 저질체력의 하반신. 두세 번 크게 뒤틀려 통증에 압도된 허리. 늘 반대로 행동하되 그 자신감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청개구리 기질. 독특함과 특이함을 아우르는 유니크의 끝물이 뜻밖의 파국을 일으키거나 번잡한 과정을 송곳처럼 꿰뚫어 의외의 성공을 거둔다. 이것이 내가 그리는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공의 포물선이라면 가장 좋을 텐데. 나는 쌀쌀한 허공에 불평만 늘여놓고 되새김질처럼 생각만 던졌다. 섣불리 불린 공포에 갇혀서는 기껏 한다는 짓이 겨우 이딴 허섭티끌 같은 푸념이라니. 정말이지 비통했다. 꽉 쥔 술병이 가벼워지자 나는 그걸 벽에 던졌다.


쨍그랑!


그렇게 시뻘겋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담배를 태우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폐와 양볼에 억지로 담아낸 연기를 뿜어낼 때마다 흩어진 하얀 정령이 어둠에 삼켜진 구름의 뒤를 쫓는 것 같았다. 폐 한 구석이 버썩 시려지노라면 옥탑방에서 같이 담배를 태우던 장군 같은 동생이 생각났다. 농사꾼이던 녀석은 풍작을 기리기 위해 무당을 불러 굿을 한다고 했더랬다. 하마나 쓸모없다고 여기던 기우제(祈雨祭)는 뭐 쉴 틈도 없나. 발을 동동 구르며 머리를 좌우로 뒤흔드는 무당. 징과 꽹과리의 반복되는 신음. 풍악소리에 맞춰 울리는 판꾼들의 자진모리와 맞아떨어지는 빠른 박자. 굿판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상투를 두른 농민들 가운데 산적 같이 더벅수염을 달던 동생은 땡볕 아래서 미간을 찡그렸다. 오, 그의 표정만 봐서는 정말로 기도를 하는지 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그렇지. 이야기만 들었으니 그 일은 게우 상상만 할 밖에. 노력 않는 자는 빌기라도 해야지. 빌지 않으면 신은 아주 잠깐이라도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동생은 말했다.


"비는 것도 노력이라고 합죠. 형님."


푸핫, 녀석. 기우제는 성공했나? 꼬부랑해진 담배가 짧아졌다. 나는 담배를 툭툭 털고 거리로 나왔다. 새벽 상인들이 간판을 올리고 장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말없이 장사준비를 하던 아저씨에게 요즘 장사는 어떻냐고 물었다.


"기분 잡치게 되지도 않는 거 묻지 마슈. 가던 길 가래야. 재수 없는 양반이게!"


씩 물은 입꼬리를 감춘 나는 시장 길거리를 빠르게 빠져나왔다. 장사도 안 되는데 뭔 윗동네 양반이 이 짝을 왔어야. 그믐달 눈으로 인사한 아주머니들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개처럼 물어뜯을 기세였다.


"거 아재요. 참말로 고런 말 마소. 그래가 저 양반 살겠소이까?"


그렇지 않은가? 안경 쓴 실눈캐가 가장 강하드라고. 아주머니 한 분이 안경을 쓰기 전에 주머니서 꺼낸 안경닦이를 쓱쓱 문지르는 게 꼭 칼갈이 같단 생각에 오금이 움찔거렸다. 눈빛에 베여 오줌지린 똥개신세가 될 텐가. 어서 이곳을 벗어날 텐가? 점프슈트를 꿰뚫는 차가운 시선은 따스운 봄날의 햇살보다 날카로웠다. 동터오는 아침을 뒤로하고 나는 재빨리 시장길목을 벗어났다.


시장길을 벗어나는 중 눈에 띈 검은 전기자전거가 보였다. 새벽 내내 내린 우기로 흉하게 더럽혀진 잉글리시 올드도그가 주변을 돌아다니며 자전거를 사수하고 있었는데,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거리를 두고 녀석을 지켜보기로 했다. 다가갈 것처럼 뜸을 들이다 짖으면 또다시 양철 쓰레기통 뒤로 숨었다. 혹시나 물을까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깨진 맥주병을 들고서 말이다. 한참 지났을까. 회빛깔의 덩치 큰 그 녀석은 밥시간이 되었는지 개구멍을 통해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 나는 거칠게 뚫린 울타리로 그 개를 훔쳐보았다. 아침안개가 낮게 깔려 있어 녀석을 보기가 어려웠다. 개밥그릇에 고개를 처박는 지금이 적기. 살살 부는 바람이 위기를 기회로 살렸군. 우편기둥에 기댄 자전거를 이끌고 서둘러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 체인은 WD가 잘 발라져 문제없었고, 개의 공포심에 양으로 치닫은 페달은 전기에너지를 먹고 앞으로 나아갔다. 뒤를 돌아보자 울타리에서 막 빠져나온 개는 짖기만 할 뿐이지 쫓지 못했다. 개 짖는 소리에 경박한 말다툼이 휩싸였다. 동네는 아수라장으로 시끄러워졌다. 후, 어쨌든 탈출 성공.


자전거를 타고 큰 도로로 나오자 아침 출근에 막힌 차들이 지나치게 붐볐다. 뒤차가 앞차에게 빨리 가라며 닫힌 창문 너머로 고함을 치는 걸 보니 뚜렷해진 눈가의 혈관에서 악성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분노에 눈 돌아가면 사람이 변한다고. 이 사람들은 다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끝없이 맴도는 메아리와 개소리에 이어 이젠 변칙적으로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클락션까지. 리드미컬하고 완벽한 환상의 멜로디가 따로 없었다. 길이 어느 정도 뚫리는 조짐이 보였다. 차간거리가 잠시 벌어진 틈을 타 나는 자전거를 몰아쳐 밟았다. 인도 문턱을 올라 지점토처럼 뭉쳐진 차를 비껴 다시 차로로 변경했다. 그때에 앞에는 어제 아침에 본 아이들이 종열로 줄을 지어 차로를 막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오후의 햇빛에 더웠는지 가끔씩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기도 했다. 나는 그 애들을 부르려다 말았다. 땀이 흥건한 손으로 점프슈트 주머니를 뒤적이자 공이 잡혔다.


'아직 주머니에 있어...!'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어느새 앞서가던 아이들은 아파트 옆에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두거나 기대었고, 파란색 모자를 쓴 한 아이가 등을 보이며 한쪽 팔을 들어 올린 동상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묵직한 T-ball 배트를 다른 한 손으로 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공은 언제 주실 건가요?"

"어어... 이거 말이지?"


나는 잠자코 있다가 놀라 어서 공을 던지려 했다. 최대한 그 애들의 몸에 맞지 않도록 정확히 가슴팍에. 그러나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고, 대각으로 시선이 급격하게 떨궈졌다. 서있는 힘조차 모두 소진한 것 같았다. 내가 쓰러진 자리에 오른손에서 빠져나온 공이 그들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굴러갔다.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이 아지랑이춤을. 굳건하다고 믿었던 나의 나무 같은 정신은 극건기를 만나 출가를. 어제와 오늘같이 일어난 시답잖은 일로 또다시 쓰러지는 내가 아니기를 바랐다. 뜨거운 땀 같은 게 두 눈에서 흘러나왔다. 아이들은 공을 잘 받았을까?


나의 바람은 그들에게 잘 전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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