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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데드 Feb 15. 2024

기행자들

05]


"자기야, 나랑 볼 사람 있는데 같이 보러 갈래?"


"그래. 좋아. 같이 볼 사람이 누구야?"


"그건 이따 보면 알겠지."


여자친구는 내 손을 잡아끌며 일본식 가정집에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녀가 왜 그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소개할 누군가가 있어서 그렇겠지. 여자친구와 나는 함께한 기간이 꽤 길었다. 하지만 인맥꽝인 나처럼 그녀도 인간관계가 협소한 편이었기에 누군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남동생? 아니면 사촌? 아니면 전혀 모르는 또 다른 누군가? 누구의 집인지도 모르는 건물로 가기까지 나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일 거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꿈 속에서 당연지사 긴장 할 수밖에. 정말 무슨 일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아이보리 색 건물이 눈에 들어올 즈음 여자친구는 두 손으로 내 양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잘할 수 있지? 별 거 아니니깐 예전에 했던 대로 하면 돼. 자기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응? 뭘?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나를 놓아주었다. 건물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양복을 입은 다른 여자 한 명이 따라 들어왔다. 그 여자는 여자친구와  이미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귀에 들리지 않게 서로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다가 웃더니 둘은 뒤를 돌아보며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건물의 2층은 임대로 내놓아 지저분한 1층과 다르게 리모델링을 말끔히 한 것 같았다. 계단을 다 올라선 뒤에 들어간 비상구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고갤 돌렸다. 양복 입은 비실한 남자가 손을 모아 장엄한 표정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귀 옆에 달린 꼬불꼬불한 하얀 선을 만지작 거리면서 뭐라고 중얼거린 다음, 구두굽소리를 내며 이 쪽을 향해 걸어왔다.


"오셨습니까? 사모님.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우리 일행은 그를 앞세워 2층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경호원으로 추정되는 그 남자는 방을 하나하나 지나칠 때마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앞만 보고 갔다. 여자친구와 양복 입은 여자는 서로 웃고 있었고, 나는 그들 뒤를 쭈뼛한 마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어느덧 어떤 큰 방이 나왔고, 경호원은 문간 옆에 서서 두 손을 안쪽으로 움직였다.


"들어가셔서 옷도 갈아입고 오세요. 뒤에 남자분."


우리 모두가 들어갈 때 경호원은 또 다른 양복남을 호출해 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남자를 방에 밀어 넣었다. 짐작하건대 우리를 감시하라는 명령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일행 셋 모두 방 안의 거대한 붙박이 옷장에 들어가 있는 동안 상당히 어려 보이는 그 남자(얼핏 보면 중고등학생~20대 초반으로 보였다)는 건물에 들어설 때 보았던 대장 경호원과 같은 자세로 우리를 감시했다. 붙박이장을 등지며 서 있었고, 여자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꼭 가야 할 데가 있다며 건물을 나갔다. 놀랍게도 경호원들은 단 한 명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자친구가 이 경호원의 심복이었던 것 같다. 그 사이 여자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던 양복 입은 여자는 조금 더 앳된 얼굴이었고, 다소 귀엽상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갑자기 옷을 벗었고 나는 너무 놀라 앞에 서 있던 경호원을 다급히 불렀다. 하지만 그는 못 들은 척 주위만 살펴볼 뿐. 결국 그 여자는 헐벗은 채로 나도 어서 벗으라는 눈짓을 줬다. 싫어, 싫다고. 여자친구가 있는데 모르는 사람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은 전혀 납득이 가질 않았다. 나는 부끄러움에 서둘러 고갤 돌렸다. 다이닝 룸같이 꾸며진 붙박이 옷장 안에서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다니. 이걸 보여주려던 거냐면서 나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려는 찰나 핸드폰은 이미 압수된 상태임을 깨달았다.


건물에 들어가기 한참 전에 여자친구는 말했다. 그 핸드폰은 소중하지여기서부터는 쓸 수 없을 거라고. 양복인들이 잔뜩 있는 이 건물에 오기 전까지 나그녀가 했던 말을 기억하디 못 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려나? 감개무량했다. 나는 항상 결정적일 때에 필요한 것을 찾지만 찾고자 하는 물건은 없고, 기억마저 잘 나지 않았다. 아아, 이제야 알겠다. 양복 입은 이 사람들은 모두 나의 쓸데없는 생각들이고 모두 철저히 준비해 꿈의 주인을 죽이려 온 것이었다. 하필 위기일 때가 되어야 알게 되다니. 알다가도 모를 꿈이다.

 

이곳을 탈출하려 하려 짧은 찰나의 순간에 계획을 세워야 했다. 쳇, 계획할 것 까지야. 정면돌파 말고는 답이 없다. 깨달음을 얻은 동시에 여자가 손목을 붙잡았다. 가지 말란 듯이 불쌍한 표정으로 고갤 가로저었다. 색욕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면 나는 아마 이 꿈에서 탈출할 수 없겠지. 그래라, 그래. 날 붙잡아줘라. 남자답게 풀어헤쳐주지. 이 꿈을.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반쯤 닫힌 붙박이 문을 걷어차 문짝이 경호원을 후려쳤다. 경호원은 말없이 앞으로 쓰러졌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둔탁한 소리에 놀란 보초 경호원이 휘슬을 불었고, 다른 경호대원들이 부리나케 이 방으로 몰려들어왔다. 경호원들은 남녀가 적절히 섞였는데 그들 모두 죽이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판단했다.


'죽이는데 망설일 필요는 없겠군.'


나는 충격에 부서져 날카로워진 나무문간을 단검 삼아 달려오는 경호원들을 하나씩 제압해 갔다. 옆차기와 앞차기, 슬라이딩, 엘보우펀치에 당해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어갔지만, 어렵지 않게 방 안의 경호원을 제압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득히 밀려오는 피곤함에 눈에 힘이 풀려 식은땀이 났다. 닦은 땀을 확인해 보니 찢어진 이마에 고인 붉은 피가 한 손을 감쌌다. 그래도 나가야 했다. 핸드폰 받으러 가야지. 아니, 여자친구가 보고 싶어. 지금 당장.

나는 뼈가 부러진 한쪽 발을 질질 끌며 방을 빠져나왔다. 경호원들의 주머니엔 소음기가 달린 권총하나 없었기에 단검 같은 뾰족한 목각을 버리고 목각을 들고 나왔다. 광범위한 동작은 체력소모가 크지만 이 목각만큼 대미지를 세게 넣을 수 있는 요긴한 무기는 없었기에 다른 경호원이 있을까 경계하며 벽을 짚으면서 천천히 비상구로 향했다. 비상구 옆에 나 있는 작은 창문에서 밝은 햇살이 길게 뻗쳐 나왔다. 이제 다 끝인 걸까. 눈이 부셨다. 한쪽 팔로 눈을 가린 그 순간. 포니테일을 한 두 여자 경호원이 동시에 달려와 녹색 액체가 든 주사기를 내 삼각근에 꽂았다.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때 입구에서 보이던 대장 경호원이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억지로 막으며 흐릿하기 꺼져가는 내 정신에 침투했다. 그는 귀에 대고 속삭였지만 목소리는 분명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히히히힛. 아. 진짜 시시하게 이게 뭐야. 어이, 사모님께서 보여주려고 한 사람이 저인건 몰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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