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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데드 Feb 19. 2024

운명은 존재한다.

06]

"헉... 헉... 헉... 헉..."


서울의 숲이 무성한 어느 작은 산. 잣나무, 떡갈나무소나무가 우거진 풀숲이 둘러진 어느 한 공원. 나는 공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고 내달렸다. 투박한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에 온몸을 적시는 미지근한 .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이 지금. 내 정신은 당장에 쪼그라든 육포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한참을 뛰다가 붉은 벽돌과 검은 철장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으음?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놀이터가 있었는데. 그때에 보았던 철장 사이로놀이터가 있었다. 유치원 즈음 될 것 같은 아이들도 소리 질렀고. 막상 도착하고 보니 비 온 뒤 굳은 모래만이 평평하게 깔려 있었다. 아이들이 즐거워하 깔깔웃음대신 정적으로 인한 불길함이 축축한 공터를 휘감았다.


'아... 뭐야, 대체 누가 이런 장난을...'




소싯적의 나는 매주 주말마다 뒷산으로 갔다.  당시 '뒷산'에서 서너 개월에 한 명씩 산짐승이 홀로 산에 오는 아이를 잡아채간다괴이소문이 학교에 나돌았다. 괴물을 목격했다는 또는 친구가 사라졌다는 괴담이 끊이질 않자 학부생과 선생님은 칭찬스티커를 안 주는 등 나름의 제지는 했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무를 타며 그 사이를 재빠르게 이동하는 대걸레 털 줄이 달린 짐승, 나쁜 말을 하면 밤에 몰래 내려와 아이를 납치한다는 할머니의 인두껍을 쓴 주술사, 키클롭스에게 먹혀 남은 아이의 뼈가 진흙과 빚어져 만들어진 해골병사, 가까이 다가가면 태풍을 일으키는 거대한 까마귀...


"뻥치네, 그걸 누가 믿냐?"

"정말 봤다니까? 골목길 따라 내려오던 딸기트럭을 보다가 우연히 산을 봤는데 그게 있었단 말이야!"

"아아, 그 하얀 털?"

"그래!"


궁상맞은 내 이야기에 대부분의 친구들은 지루해했다. 내가 본 사실들이 모두 거짓이라면, 그렇게 되면 난... 철천지원수 거짓말쟁이가 되겠지.


"손들어, 9번!"


"네!!"


"중간고사가 다음 주다. 가만히 멍하게 있지 말고, 35페이지에 시 한 번 읊어보자."


"사랑이 올 때."


"자리에 서서 읊어야지."


"사... 사랑이 올 때. 나태주.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있을 때 자주 그의 눈빛을 느끼고, 아주 멀리 헤어져 있을 때 그의 숨소리까지 듣게 된다면... 명히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심하지 말아라. 부끄러워 숨기지 말아라. 사랑은... 바로 그렇게 오는 것이다. 고개 돌리고..."


[딩동댕동-딩동댕동]


"자, 자, 수업 끝이다. 얘들아. 밥 먹고 남은 시간은 각자  복습하도록."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벤치 옆에 세워진 보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상체만 하게 큰 보드를 들고 바닥을 그으며 공터 한 바퀴를 돌았다. 원 바깥에 홈파여있길래 여러 개의 틈을 따라 비껴 그었다. 다시 한 바퀴를 돌다가 까치살모사 떼거지 쉿 쉿 거리며  위협했다. 아찔함에 눈을 감아버렸다. 원 한가운데서 검은 까치살모사가 일제히 가운데로 달려든 그 순간...!


나는 위에서 무언갈 타고 있던 또 다른 나를 향해 손을 뻗었고, 손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 찰나에 바뀐 시점에서 나는 둥근 원 안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교복 입은 소녀를 보았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했지만 들을 수 없었다. 우린 서로에게 닿을 수가...


'....... 요, 아저씨.'

.

.

.


여긴 해운대.

뙤약볕이 내리쬐는 하얀 모래사장에 나들이를 나온 가족과 커플들이 즐비했다. 새우과자를 던지며 갈매기를 보고 깔깔거리는 아이들, 강아지가 탄 유모차를 끄는 아주머니들, 다부진 몸에 근엄한 표정을 짓는 거구의 청년들, 선글라스를 쓰고 사진 찍기를 요청하는 젊은 외국인들....


거기서 안내소를 돌아보았는데 안내소 옆에 어느 고등학교로 가는 이정표가 붙어있었다. 다른 꿈속의 '모뉴먼트 벨리'(황색토층이 쌓여 형성된 사막협곡)에서 보았던 허름한 여자고등학교와 교명이 같았다.


[미륵여자고등학교]


그 고등학교의 학생을 한 번도  없었지만, 혹시나 해서 여자애의 복장을 살펴보았다. 주머니가 달린 붉은 체크무늬 반바지, 흰 블라우스에 회색 조끼, 광택이 희끗한 검은 왕코부츠에 종아리까지 올린 주황색 줄무늬 양말, 목에 두른 스카프까지.

의심치 않았다. 그 애가 미륵여고 학생인 것을. 왠지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망고 아이스크림을 사 주었다. 군것질을 빌미로 모뉴먼트 벨리의 경사로를 말 타고 내려오던 학생들을 보았냐고 물었지만 배시시 웃기만 했다. 어쩔 수 없지. 뭐라고 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나는 서핑보드를 한쪽 옆구리에 끼고 이정표 옆에 있었다. 서핑보드를 바닥에 깔면 킥보드나 오토바이, 태양에너지로 하늘을 나는 페가시 오프레서로 변신이 가능했으므로 서핑보드에 달린 페달을 밟고 시동을 걸어 킥보드로 변신시켰다. 그때 여자애가 자기도 갈 곳이 있다며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 애가 다짜고짜 허리를 감싸며 오프레서에 올라탔다.


'가고 싶은 데 가요.'


 오프레서의 마하 4의 속도로 공터에 금방 도착했다. 헬멧 고글을 올려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허리를 두르던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애는 공터 한가운데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방은 패인 모래에 숨은 검은 뱀 천지였다.


'그 애는 내가 겪은 고통을 겪게 해서는 안 돼...!'


 애뱀을 피해 원 안에서 위로 손을 뻗는  공터의 울타리 밖에서 멍하니 보았다. 시점이 변경된 공중에서 둥둥 떠 있던 나도 그녀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

.

.

사랑이 올 때

의심하지 말아라


고개 돌리고

부끄러워 숨기지 말아라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있을 때


아주 멀리 헤어져 있을 때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숨소리까지 듣게 된다면


분명히 당신은

자주 그의 눈빛을 느끼고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은

바로 그렇게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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