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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데드 Apr 09. 2024

균형

07]

고요한 새벽 아침. 나는 층간이 좁은 건물의 1층을 거닐고 있었다. 왼쪽 뺨에 비치는 밝은 새벽빛을 받으며 한산한 공기를 음미했다. 그 맛이 시원섭섭하고 좋았다. 우연히 어떤 하얀 새 두 마리가 하늘을 뱅글뱅글 돌다가 날개를 접으며 창가에 앉았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사무치는 쓸쓸함에 그들이 왠지 반가워 손짓을 했다. 검은 날갯죽지를 숨기는 갈매기 두 마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나라는 인간이 싫지만은 않은 듯싶었다. 


어쩌다 나는 이들을 만났을까. 이 또한 필연의 필름 속에 잠시 담긴 우연일 테다. 나는 하품을 하며 현관문 옆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슬며시 오른쪽으로 밀었다. 거의 다 열 때 즈음 녹이 슨 소음이 발생하자 한 갈매기는 다른 곳으로 휘영청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다른 한 마리는 꼿꼿이 자리를 지켰다. 나는 놀라지 않았어. 앞에 보이는 검은 날개의 하얀 새가, 갈매기가 꼭 그렇게 말한 것만 같아 마음이 놓였다. 


작년 여름엔 새벽에 바다를 끼고 있는 모래사장에서 자주 산책을 했었다. 이틀에 한 번... 아니, 거의 매일.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붉은 보도블록 사이에 들어간 모래를 자근자근 밟으며 새벽 바닷바람을 맞으며 오늘은 무엇을 할지, 그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또 뭘 할지, 앞으로의 계획과 나아갈 방향은 어디인지 뇌 안에서는 중구난방 폭격이 일었지만 살결에 느껴지는 차가운 따스함은 되려 날 안정시켰다. 그 중간의 어딘가. 나는 꽤 험난한 일상에 노출되어 있었다. 술 먹고 돌아오는 동거인에게 살인예고를 듣거나 모임에서 돈이 있다는 얘길 함부로 해 바보 같은 동정심으로 야금야금 자금을 털렸던 난 아무튼, 나잇값 못하는 눈물을 흘렸었다. 사하라 사막에서는 모래를 조금만 파도 검은 기름이 철철 나던데 이 땅은 왜 몹쓸 보도블록으로 막혀 있는지. 역시 걸으면서도 눈물이 났다. 


새벽바람이 차서 그런가, 안약 넣는 걸 깜빡해서 그런가, 꽃샘추위에 딸려온 중국 황사라서 그런가. 감정이 그냥 슬퍼서 그런가. 나는 눈물이 마른, 그러나 밖으로 마음을 내지 않는 그런 바보 같은 사람. 

창문을 닫으려는 찰나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다, 왔어, 그녀가. 날 바다에 담그려 했던 아이가.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을 근거리에서 들었을 땐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얘, 난 널 구하려고 그런 거야.'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닷물이 건물을 조금씩 젖혀갔고, 작은 물고기들이 나선형 모양을 그리며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창틀에 걸터앉아 발 끝으로 가만히 바닷물을 느꼈다. 빙산을 녹인 것처럼 바닷물은 너무 차가웠다. 금방이라도 동상에 걸릴 것 같았지만 버틸만했다. 물고기 무리가 입질로 발을 쪼다가 꼬리지느러미로 툭 치며 사방으로 퍼졌다. 갈매기는 때를 놓치지 않고 물고기낚아챈 후 자리를 떴다. 갑자기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명이 아니라 여러 명. 제길, 이번 꿈도 도망치 기인가?

2m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일랜드인, 근육이 균형 있게 잡힌 아프리카, 은색장발의 멀대 동양인이 나와 제법 가까워지자 뭐라고 중얼거렸다. 


"3일 후 죽음."


다행히 그들 손에는 어떠한 둔기도 없었다. 그저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거다. 그래, 나 어차피 죽어. 

반박하고 싶었다. 근데 3일은 아니지 않냐고, 나는 삶의 의미를 찾았으니 살아야 날이 많이 남았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 전, 나는 소파에 기대어 알베르 카뮈의【시지프 신화】를 읽었다. 그는 책에 이런 구절을 썼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 가만히 허연 천장을 보고 있노라면 자살충동을 느낀다거나 엇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은 많다. 아니라고 하기엔 산증인이 넘쳐나는 데다가 꺼낸 말은 모두 지킨다는 기존 철학을 완곡히 무너뜨렸기 때문에 불안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끝끝내 자살을 하지 않았으므로 굳건했던 내 당위성은 천재지변을 야기하는 아파트가 붕괴되는 꿈처럼 무너진 셈이다. 

외국인 3 총사는 마치 독촉장과도 같다. 어서 죽으라고, 네가 한 말 어서 지키라고 누군가 보낸 저승의 사자일 테다. 여전히 나는 인생의 고랑을 밟을 때 우울하다거나 삶이 의미 없다고 느끼지만 그 기분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쓸데없는 감정이 요동쳐 울컥할 때마다 분을 침과 함께 삼키곤 한다. 그리곤 한숨으로 뱉는다. 영화 보듯 익숙한 일상의 조각이다. 담배가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아도 이것만큼 안정되는 유기물도 없다. 약보다 현실을 살게 해주는 것 같은 위안을 준다. 그 황홀함은 마치 꿈과도 같아서 뜬금없이 떠오른 자살을 배제시킬 때마다 약소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어떤 죽음은 당돌하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하는 도구가 자살이 될 수 없듯이 얇실하게 이어나가는 희망에 또 다른 파란을 일으키는 획기가 죽음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육신 하나로 상정할 수 없는 미묘한 체계가 존재한다. 그것을 나는 믿는다. 나는 아스트랄계에 머물러 있을 때 썩은 것들이 저지른 영혼의 겁탈과 죽임에 과히 분개했고, 지금도 그렇다. 


체게바라는 혁명의 촛불을, 다자이 오사무는 시대적 방황을. 


다음 새벽에는 어떠한 장면이 떠오를지 알 수 없다. 

오망성의 뿔이 빛을 의미한다면 나는 빛을 받지 않는 그림자들을 좇는다. 

당돌한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 이들에게 꿈에서 끄집어낸 글로써 나는 화답한다. 

새벽녘 바닷바람은 꽤 신선했고, 

차가움 속의 철학은 태양보다 뜨거운 빛보다 더 정열적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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