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데드 May 31. 2024

콘파냐(compaña) (1)

크림과 커피, 그 사이의 무언가


평온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재앙 같은 현실을 평온하다고 믿으며 정상인 것처럼 살아간다. 그 말인즉 우리는, 그러니까 지상 및 수중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먹이사슬이라는 지옥불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사실 그건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신은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적어도 죽을 고비를 넘겨 지켜낸 평화는 현실이 되었고 우리 행성 사람들은 그것을 누리니까. 신은 평화를 지키지 못했지만 우리는 기어이 이루고야 말았다. 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으음, 신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평범한 현실은 매우 지루하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평온한 일상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나는 문제없이 돌아가는 삶을 즐긴다. 타마린드(전 세계 열대지역에서 재배되는 장미목 콩과의 나무 : 셔벗, 사과, 자두향이 나며 톡 쏘는 향료의 원재료로 쓰인다) 하리토스를 게걸스럽게 마시자 묵힌 갈증이 해소된 것만 같았다. 땡볕이 내리쬐는 바깥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보면 공상과 떨어진 현실을 정말이지 진짜로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피부에 스며드는 따스함과 그늘이 주는 포근한 안정감, 이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이면 그건 정말 이상한 날일 것이다. 괴이한 일이 벌어진다거나 하는 우연한 사건은 평온했던 표정을 보기 좋게 구겨버릴 것 같아. 다시 말하지만 일상은 그래, 평범한 것이 좋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주는 것 역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상인들이 펼쳐놓은 골동품 장사진을 거쳐가면서 팔기 위해 올려진 시계를 흘겨보았다. 아차차, 밥시간이 되었군.


때에 맞춰 울린 배꼽소리에 간단한 요깃거리나 할 생각이었다. 플라야 델 까르벤 비치로 갈 기분은 아니었다. 칫, 바보 같긴. 두 번 다시는 배 채울 시간에 뜬금없이 해변으로 가 모래로 시간을 낭비할 멍청한 선택은 하지 않을 테다. 굶어가면서 경치에만 흠뻑 빠지는 꼴이 뭐가 좋단 말인가. 난 어릴 때부터 배를 채우는 게 중요했다. 우리 집은 지독히 가난해서 '배부르다'는 단어에 익숙지 않았다. 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지겨운 가난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렴 좋아! 뭐.'배부른 날'로 바꿀 거다. 파벨라 길거리에서 불쌍한 표정으로 땡전이나 구걸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테야, 홀로 자국을 떠난 아빠처럼 기러기가 되지 않을 테야. 사랑하는 나의 가정을 외면하지 않을 테야. Qué cabrón! 그러나 현실은 좀처이상과 좁혀지지 않았다. 그게 자꾸 발을 건다. 말을 걸고,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다.


녹색빛깔 바다내음이 불어오는 길거리는 집과 그리 멀지 않았다. 건물을 끼고 사이에 상인들이 펼친 천막이 줄을 이룬 거리를 시간 동안 지나가야 비로소 동네를 빠져나오는 길이 보였다. 한 걸음 걸을수록 맛있는 과일향과 빵내음에 고달픔은 더해갔다. 작고 소중한 내 230페소. 허기의 한계에 다다르자 친절한 나의 소꿉친구 벤체릴로 가 보고 싶었다. 꽃집을 지나치다 우연히 어느 말라가는 꽃을 발견했는데 그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티후아나(아주머니)제때 물을 주지 않아 서서히 죽어가는 루드베키아(... 의 일종콘플라워 : 멕시코 모자 솜브레로의 모양과 유사한 꽃) 왠지 안쓰러웠다. 배고픈 정신에 헛것이 보였는지 푹푹 찢은 양고기에 꿀과 매콤한 타코소스가 뿌려진 허니 치폴레가 먹고 싶었다. 아, 배고파, 배고파. 바로 그때 투박하게 달려오는 무언가가 티후아나 옆에 멈춰 섰다.  


"헤이, 헤이! 벤체릴로!"


녀석은 나의 절친한 친구다. 멀디 먼 장사진을 달려 여기까지 오다니, 녀석도 어지간히 내가 보고 싶었나 보다. 쯧. 사료를 살 돈이 부족했기에 녀석은 정육점을 운영하는 상인이 새로 온 손님에게 상품에 대해 주저리 설명하는 틈을 타 몰래 롱가니사(기다란 살사향의 소시지) 훔쳐왔다. Amigo! 아주 잘했어!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로움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과 같았다. 그 조건을 듣지 않는 사람과 함께라면 형식에 가두어져 불편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 뻔하기에 벤처릴로만이 내 장단점을 모두 안아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우리는 서둘러 시장거리를 빠져나왔다. 우리는 델 까르벤 비치 근처에 도착했다.  


"착하지. 벤체릴로, 해변으로 가자."


그는 낑낑대며 불안한 눈빛으로 이 쪽을 올려다보았다. 건조하고 푸석한 발의 스텝 템포를 올렸다. 그대로 바다가 철썩이는 곳으로 향했다. 거리를 빠져나온 뒤로 온종일 종종걸음인 녀석, 고마워. 어려운 생활고로 오랜만에 느낀 최악의 자유시간였다. 그야... 그야. 굶주림은 절대 싫기 때문이다. 최고로 만들어진 지금의 상황, 모든 공로는 벤체릴로, 이 녀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네가 함께라면 앞으로의 매일은 최고의 날일 거야! 나는 낙타조끼에 숨긴 롱가니사를 꺼내 절반으로 찢어 벤처릴로의 입에 갖다 대었다. 벤체릴로는 말랑하고 큼직한 코를 벌름거리다 넙죽 롱가니사를 절반 먹어치웠다. 그의 입술 끝으로 고인 침이 흘러내렸다. 어때, 만족해?

나는 뭉툭하게 쌓아 올려진 모래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다리에 팔을 올려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벤체릴로가 먹다 남은 롱가니사의 질긴 껍질에 배인 매콤 짭짤한 향이 코를 찔렀다, 캡사이신의 향일까, 식탐의 악마가 유혹하는 향일까? 음. 그렇다 해도 맛은 제법 괜찮았다. 별로 배부르진 않았지만 지독하게 온종일 우릴 괴롭혔던 배고픔은 사라졌다. 턱없이 부족한 양이라고 한 들 작고 보잘것없는 양의 음식은 상상을 배부르게 만든다. 창작의 미는 가난에서 우러나온다. 검소하고 고달픈 생활을 할 때 촉각은 4배로 예민해지고, 오랜 겨울잠을 재워뒀던 잠재력이 빛을 발한다. 나는 이 에너지를 매우 사랑한다. 떠돈다는 건 무엇이냐, 아니 무슨 의미인가, 뭐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의미되시겠다. 오늘따라 날이 참 좋다.


자,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지?


소름 돋는 굉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공상에나 있을법한 괴상한 오브제가 나타났다. 그건... 이때껏 본 물체 중 가장 거대했다. 벤체릴로는 스스러치게 놀라 잠에서 깨었다. 상황파악이 되었는지 그 물체를 향해 거침없이 짖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모래 위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온 하늘을 덮는 크기의 접시 같은 비행물체가 나타나더니 옅은 노란빛의 굵은 광선을 해안가로 쏘았다. 구름은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수평선이 보이는 곳까지 그 물체가 완벽하게 장악한 것이다. 그 비행물체가 내리쬔 빛에서는 어째선가 인간같이 생긴 머리만 크고 홀쭉한 사람이...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아니, 저게 사람인가?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미친 듯이 짖기만 하고 달려들지 않는 벤처릴로를 부르며 자리를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벤체릴로는 망고만 한 크기의 눈을 가진 괴상한 생물체가 다가올수록 더 크게 짖었다. 그러면 안 돼, 아서라, 벤치! 도망치라고!


이상한 그 괴물은 이 벤처릴로를 쓰다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이어 붉은색의 복장을 한 다른 괴물이 물체에서 내렸다. 역시 사람같이 생긴 괴상한 생물체였다. 그 붉은 괴물은 두 손을 올려 양쪽으로 뻗었다. 거대한 물체에서 수십, 수천 개의 투명한 전기공은 어느새 우리가 사는 동네를 넘어 나라 전체를 덮었다. 전기공은 육안으로 속도가 잡히지 않을 만큼 아주 빠르게 건물이 닿지도 못할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동네를 감쌌다. 수많은 전기공에서 거대한 벼락이 동시에 내리치자 장막이 펼쳐졌다. 붉은 괴물이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나는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번개는 계속해서 내리쳤고, 순식간에 해안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나는 당황한 나머지 주변을 둘러보다 벤체릴로 가 사라진 걸 눈치챌 수 없었다. 이런, 뭘 해야 하지?

  

거대한 장막이 걷히고 고요한 정적이 일었다. 해안가 도로를 달렸던 차들이 일제히 멈췄고, 지금은 마치 재앙 같았다. 재앙, 재앙이야, 이건. 벤체릴로 가 사라진 건 그 괴물 때문 일거야.

나는 선택해야 했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도망칠 것인지, 벤체릴로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 것인지.

평범함이냐, 모험이냐. 이런 고민을 하는 것조차 어이없지만...! 나는 게이트가 닫히기 전에 비행물체로부터 천천히 사라지는 활로에 발을 내디뎠다.

바보 같은 결정 따윈 하지 않아, 내 친구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던 감당하겠어! 벤체릴로, 미안해! 반드시 구하러 갈게!

매거진의 이전글 균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