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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구름 Jul 29. 2023

나의 학생들

교단일기 19

23년간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2013년 연구년으로 학교를 떠나 있었던 한 해를 제외하고 22년간 아이들을 매년 만나왔던 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해온 시간이 무척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교사의 존재 자체가 배움이 필요한 학생들을 위해 있기에 학생들에게 좋은 배움을 주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항상 부족했던 선생님이었던 것 같다.   나의 교사관은 아이들에게 학교에 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도록 도와 주자는 것이었기에 그를 위해 노력했지만 학생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지금의 우리 반 교실에 있는 아이들이 학교에 오는 것이 즐겁고 재밌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교사 생활을 마무리하는 요즘 0점짜리 선생님은 아니고 한 70점짜리 선생님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학생들과 함께 한 지난 시간들은 너무나 소중하고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기쁨과 행복을, 때로는 실망과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들이 아이들과 함께 즐겁고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따뜻하고 착한 마음의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항상 학교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모여 이야기하다 보면 아이들은 착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을 지지하는 친구들이 많지만 가끔 학생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어려움을 겪다 보면 성악설의 생각에 조금 공감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순수하고 착한 마음으로 다른 친구, 선생님, 부모님과 어른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천사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경험해 본 결과 아이들을 엇나가게 하고 잘못을 하게 만드는 원인은 대부분이 어른이 하는 잘못된 모습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아이가 폭력적이고 소위 사고를 치는 등 학교생활에서 어려운 모습을 보인다고 하면 대부분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의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가정에서 부모님들의 어려운 생활들을 보며 자라난 경우가 많았다.  물론 부모님의 상황도 여러 가지로 피치 못할 사정이었기에 그런 결과가 되긴 하였겠지만 그럼에도 조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이 있거나 주변에도 여러 가지 도움을 주고 있는 상황에 있는 아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바르게 자라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요즘의 시기 부모들도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자녀를 키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부모의 기본적인 자질이 없는 부모도 꽤 많았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충분히 학교와 선생님들과 소통하며 대화하면 해결되고 문제 되지 않는 일들도 많은데 소위 진상 학부모가 되어 학교와 마찰을 겪고 선생님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자녀만 생각하고 자기 생각만 맞다는 잘못된 가치관으로 점철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가정의 자녀는 더 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영향으로 삐뚤어지거나 바르지 않은 성장을 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물론 모든 경우에 그렇다 할 순 없지만 내가 경험한 학부모님들은 그랬다.

 따뜻하고 정을 나누는 가정에서 부모와 가족들의 사랑을 느끼고 자란 아이들은 평소에도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자신의 잘못을 잘 인정하고 반성하고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바른 인성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힘들더라도 그 어려움을 참아내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기에 학업성적도 좋은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에서는 사회를 살아가는 기본적인 지식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 인성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아이가 아무리 공부를 잘해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간들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올바른 사회란 나와 함께 다른 사람의 입장과 행복을 생각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바른 사람이 많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병들고 약해져 갈 것이다.  바른 인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도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나의 첫 제자들은 군 제대 후 발령받은 수원의 화서초 2학년 3반 친구들이다.  2학기에 중간발령을 받은 내가 담임을 하게 된 우리 반 친구들은 나에게는  말 그대로 꼬마 악동들이었다.   군 생활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가 경험한 것은 군대에서 교육했던 성인 남자들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2학년 꼬맹이들을 가르치는 담임이 되어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들은 어땠을까?   대학 4년간 교육에 대하여 열심히 배우고 교생실습등도 모두 마치긴 했지만 실전 학교에 투입되어 담임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신세계였던 것 같다.  

 내가 담임을 하게 된 우리 반의 전 담임선생님은 나이가 많으신 여자선생님이셨는데 명퇴를 하시고 중간에 그만두는 게 아이들에게 미안해서인지 마지막 수업을 하실 때까지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랬다가 갑자기 2학기 새로운 담임선생님이라고 지난달까지 군인이었던 어떤 아저씨가 턱 하고 들어오니 아이들도 깜짝 놀랐을 것 같다.  첫 수업에 교감선생님께서 소개를 해주시고 들어갔던 교실에서 보는 아이들의 모습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의 귀여운 아가들이었는데 지금은 그 아이들이 서른두 살 어른이 되어 있겠지. 

 그렇게 2학기에 새롭게 맡게 된 아이들에게 나는 참 서투른 교사였던 것 같다.  2학년의 특성상 아이들은 아주 작은 거 하나까지 선생님에게 말하고 이르고 물어본다.   그래도 서비스정신이 투철했던 나는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눈높이로 교육하려고 노력했지만 결코 잘할 수 없는 신규교사 그 자체였던 것 같다.   그래도 노련하고 경험 많은 동학년 선생님들이 알려주시고 코치해 주셔서 첫 교사 생활을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 어느 학교나 젊은 남자교사를 최우선적으로 배치하는 초등학교 생활의 최고 난도 6학년의 담임을 하게 된다.  그 당시 6학년의 학급이었지만 많은 학생들이 다니던 큰 규모의 학교에 학급당 정원도 40명이 넘었던 시기였어서 40여 명의 6학년 친구들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저학년보다는 말이 통하던 6학년 아이들과 함께 2000년을 시작할 수 있어서 나름 즐겁고 재미있게 지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우리 반에는 도움이 필요한 한 친구도 함께 생활했는데 이 친구가 평소 학급에서 재밌게 잘 지내고 생활하였는데 한 번은 조절이 잘 안 되었는지 화장실 가는 걸 교실에서 실수한 경우가 있었다.   주변의 친구들이 냄새를 맡고 이야기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 당시 나는 당연히 그 학생의 뒤처리를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조용히 샤워실이 있었던 화장실로 데려가 씻기고 학교 어울림반에 있는 여벌의 옷으로 갈아입혀 수업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래도 같은 반 친구들이 그 친구를 배려하여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 주고 편하게 그 친구를 대해줘서 참 고마웠던 마음이 들었다. 또 잠깐동안이었지만 담임이 없을 때 반장등이 조용히 학급관리를 해줘서 평화롭게 그 시간이 지나갔던 것 같다.   그 친구들도 이제 서른여섯이 되었겠네.  

 

 그 당시 학급 운영을 할 때 학급에 좀 반항아적 기질이 있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특별히 문제 행동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체육시간에 나에게 반항을 하여 내가 많이 혼을 냈었다.  그리고 교실에 들어와 쉬는 시간에 그 친구가 미친 듯이 연습장에 뭔가를 쓰고 있어서 보았더니 연습장 한 장 가득 ‘ 다 죽일 거야’라고 쓰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학생의 학부모님도 학교에 오시고 상담을 통해서 다음에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선생님이었던 내가 그 학생을 더 보듬어 주지 못하고 혼내고 제압하려고만 했던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 친구도 나름 힘든 하루를 보냈을 텐데 그 마음을 잘 몰라줬던 선생님이었던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다.  경력 6개월의 초짜 선생님이 너희들의 마음을 잘 몰라줘서 미안했다.


그렇게 수원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남양주로 이동하여서도 바로 6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내가 전입해서 온 그 학교는 몇 해만 먼저 발령 났었어도 ‘아시아의 별’ 보아의 담임이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후에 알게 되었다.  

 그 학교도 남양주의 아파트 단지 학생들이 다니던 큰 규모의 학교였어서 학급 수가 많았는데 도시의 학교다 보니 중간층의 학생들이 두터워 수업이든 생활지도든 그래도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  나름 학급에 아이들이 많다 보면 보통의 아이들이 분위기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중의 리더 격인 아이가 긍정적이고 성실하면 그 학급은 분위기가 보통 좋았다. 또 열심히 공부하는 최상위권 학생들은 누가 시켜서 하기보단 자신이 그 공부를 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고 노력해서 얻는 성취를 통해 성실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다.   남양주에서 근무할 때는 운동회에도 진심이었던 시기였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학교 학생수가 많다 보니 고학년에서 항상 차전놀이를 했었다.  차전놀이는 커다란 통나무로 만든 동채를 만들고 그 위에 대장학생이 타서 그 동채를 학생들이 들고 서로 상대방 동채와 엇갈리게 하여 겨루는 경기인데 초등학생들이 하기 위험하기도 하고 동채를 만들고 보관하는 것들이 어려워 사라진 줄 알았는데 남양주의 학교에서 그 차전놀이를 준비해서 하게 되었던 일이 생각난다. 스타킹으로 상투를 만들어 쓰고 ‘얼싸 덜 싸’를 외치면서 서로 몸싸움하고 동채싸움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또 복장을 한 두 대장이 하늘로 솟아오를 때면 운동회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당시 그 친구들은 그래도 그때 차전놀이 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을까?   운동회 연습에 열심이고 진심이었던 그땐 운동장에서 운동회 연습으로 뜨거운 9월 한 달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교사였던 나도 힘들었는데 아이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그런 운동회는 하지 않는다.  교사도 힘들고 아이들도 힘든 일을 학교 교육과정으로 할 이유는 없다.


남양주에서 2년을 보내고 여주로 학교를 옮겨서는 여주에서 큰 규모 학교로 발령이 났었다.  동학년이 3, 4반 있었던 4학년 담임을 했었는데  이때 중학년의 편안함을 또 한 번 느낀 시간이 되었다.  그 당시 아이들이 똘똘하고 영리해서 그 아이들과 연구대회도 참여하여 좋은 결과를 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들도 나름 애정을 가지고 지도했어서 가끔 기억이 나는데 4학년이지만 순수하고 착한 마음으로 내가 교육하는 것들을 잘 따라줘서 그 덕에 좋은 연구대회 결과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첫 연구대회를 1등급으로 만들어준 그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그 당시 연구대회 주제가 바른 정보통신윤리교육이었는데 그 당시 나의 교육과 활동들이 그 친구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여주에서는 큰 학교에서 작은 학교로 옮겨 2학년과 4학년을 경험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 당시 아이들은 큰 어려움 없이 선생님을 잘 따라주고 학부모님들도 좋으신 분 들 이어서 별문제 없이 잘 지냈는데 학교 생활하는 데 뭔가 공허한 마음을 느끼게 되고 학교 생활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당시 생활담당 업무를 맡았었는데 학생들을 바른생활을 위해 인성교육과 안전지도등에 관심을 갖고 지도를 열심히 해서 학교표창도 받았던 기억이 있다.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던 중에 전 학교에서 같이 근무했었던 부장선생님이었던 분이 교감으로 승진하셔서 근무하는 학교에 연구부장으로 일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에 고민하다가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를 6 학급의 작은 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전 학교도 6 학급의 학교였지만 학생수가 110명이 넘는 한 반의 학생이 20명 정도 되는 학교였다면 새로 옮긴 학교는 6 학급이지만 한 반의 학생수가 10명 내외로 구성되어 있는 학교였다.  지금의 여주 학교들이 학생수 감소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 당시 그 학교도 학구의 마을 학생수가 줄어들어 학생 정원을 채우기 어려웠고 그 당시 교장, 교감선생님은 인근의 아파트 단지에 홍보전단지까지 뿌리면서 학생수 확보에 노력했었다.  큰 학교에서는 학생수 과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지역사회에서 스쿨버스를 운영하여 학생들을 분산하는 것에는 큰 틀에서 합의가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조금 거리가 있는 아파트 단지에 홍보를 통해 꽤 많은 학생들이 전입을 와서 학교는 유지가 잘 될 수 있었고 그 학생들도 작은 학교의 다양한 교육활동과 체험학습장등의 프로그램을 경험하며 잘 지낼 수 있었다.  


 그 당시 줄어든 학생수를 위해 나에게 소중한 두 딸들은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결정하고 같이 데리고 학교를 다녔는데 첫째는 초등학교 입학을 둘째는 병설 유치원 입학을 하면서 아빠와 함께 학교를 다니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아침에 바쁘게 준비하여 어린 두 딸들을 데리고 학교에 가서 연구부장으로 일을 하면서 체육전담을 한 이 시기가 나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기였던 것 같다.  담임을 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수업 운영을 하던 약 10여 년의 시간이 무척 나를 지치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학교를 옮기면서 전담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다른 선생님들의 의견도 별다르게 전담을 원하는 선생님이 없었어서 담임이 아닌 전담교사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자녀들을 데리고 다니다 보니 어떤 학급의 담임을 하는 것이 다른 선생님들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서 전담을 하게 되었는데 내 인생에서 체육이라는 중요한 교과와 전담수업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며 지쳐있었던 내 마음의 회복과 교육적 고민들을 하며 한 단계 성장을 하는 계기가 된다.

 그 당시 여주에 몇 개 안 되는 체육관 없는 학교가 우리 학교였는데 체육관이 없다는 사실이 여름, 겨울 체육수업을 하는데 많은 제한이 있긴 했지만 그나마 있었던 우레탄 농구장과 작은 사각형의 정자가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되었기에 이런저런 체육 수업을 하며 학생들과 운동장을 열심히 뛰었던 기억이 난다.  

 이 당시 체육수업을 하면서 처음 접했던 것이 플로어볼이었는데 그 당시 대한플로어볼협회에서 진행하던 찾아가는 플로어볼 수업을 신청한 것이 기회가 되어 그 당시 플로어볼이라는 뉴스포츠 종목 자체를 잘 모르고 있었는데 친절한 강사가 장비를 챙겨서 학교를 찾아와 플로어볼에 대한 교육과 실전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그 학교는 플로어볼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제대로 된 바닥이 별로 없었기도 하고 양쪽이 뻥 뚫린 농구코트에서는 공 주우러 다니기 바빴기 때문이다.  이때 처음 접했던 플로어볼은 내가 연구년을 끝내고 체육영역 초빙교사로 가게 되는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작은 학교의 특징에 맞게 학교에서는 다양한 전교생 어울림 프로그램들을 많이 했었는데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형제를 맺어 활동하는 육 남매 프로그램,  학교에서 캠핑하는 뒤뜰야영,  지역사회와 가족들이 함께 즐기는 운동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소속감과 선후배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당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체육수업과 도덕수업을 전담수업으로 지도했었는데 그 당시 학생들이 무척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선생님인 나에게 가르치는 보람과 재미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래서 그 당시 대표적인 연구대회인 수업실기대회에 참여한 것도 이때가 되겠다.  수업실기는 수업 전문성을 위해 교육청에서 일정 기준을 가진 선생님들의 계획서를 받아 일 년간 전문적인 수업실기와 보고서를 평가하여 등급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말이 좋아서 일 년간 수업실기지 실제로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당시 교감선생님께서 연구를 좋아하고 후배들의 연구활동을 장려하시던 분이라 적극 도와주셨는데 잘 모르지만 열심히 배워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수업실기에 도전하여 계획서 제출, 학교 자체 수업공개, 수업분석, 중간보고서 제출, 심사위원 심사 수업공개, 수업 연구보고서 제출등 일 년 동안 수업에 올인을 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첫 번째 수업 실기에서 체육수업을 주제로 선정하여 가장 높은 등급인 1등급을 받을 수 있었는데 내가 정한 학년의 아이들을 정말 많이 도와주고 따라와 주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바로 이어서 도전한 두 번째 수업실기대회에서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체육관이 없었던 우리 학교에서 체육수업을 공개수업으로 준비하고 있다가 심사위원이 와서 심사하는 체육수업날 비가 와버린 것이었다.  우천 시 수업 계획이 있긴 했지만 주로 학생활동을 많이 하는 것으로 계획을 짜놓았던 터라 우천 시 계획으로 수업하면 보여줄 것이 별로 없는 평범한 수업이 되었기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며 비가 멈추어 주길 기다렸지만 야속한 비는 계속 내렸고 이번 수업실기는 망했구나를 외치고 있는 사이 교감선생님께서 10분 거리의 옆학교 체육관을 섭외해 주시고 학생들의 이동도 도와주셔서 거짐 정해진 한 시간 전에 다른 학교 체육관에서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아이들도 처음 가본 남의 학교 체육관에서 실시한 수업실기대회에서 나는 두 번째 1등급을 받아 참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고생했던 아이들에게도 맛있는 피자를 사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두 딸들과 파란만장한 학교생활을 하고 부장역할을 하다가 4년째 되던 해는 내내 부장교사를 하던 걸 다른 선생님들이 혁신학교를 준비해 보겠다고 하여 양보해 드리고 혁신학교로 지정되는 것을 열심히 도왔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그 학교에서의 4년을 정리하고 나는 새로운 도전인 연구년이라는 것에 도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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