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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Jun 08. 2023

일요일이 지나가는 소리

골목길 연작에세이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은 조금은 늦게 하루를 시작하며, 침대 위에서 게으르게 뒤척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평일보다 늦은 아침을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워 뒹굴거려도 뭐라 탓할 사람도 없다. 일요일이니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나 할까. 조용히 지나가는 일요일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전 8시, 대로변에 위치한 주민 쉼터에 두세 명의 어르신들이 의자에 앉아 두서없는 시선을 내보내고 있었다. 한낮의 강한 햇살을 막아줄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쥔 채 어딘가를 바라보는 어르신들이었다. 옆에 앉아 말을 걸어볼까 싶었지만 막상 내가 건넨 말이 어르신들의 허전한 옆구리를 증폭시킬 것 같은 소심함에 발길을 돌렸다. 


행복한 식사와 24시 무인카페, 늘찬포차가 있는 난곡로 24길에 들어서니 상가들이 길 양쪽으로 즐비하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 사이로 미용실이 먼저 손님들을 맞았다. 가족 모임이나 격식을 차리고 가야 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한 여성들의 머리단장이 한창이었다. 고데기를 이용해 빈약한 머리숱을 한껏 부풀리고, 삐죽삐죽하게 자라난 지저분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염색약을 바르고 화사한 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을 매만지느라 분주했다. 


가게들을 벗어나니 주택이 밀집한 골목길이 나왔다. 빌라와 다세대주택들이 빼곡한 골목길에 목련나무와 장미 넝쿨이 어우러진 단독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강렬한 붉은색의 장미는 무작위로 뻗어나간 넝쿨이 아니라 주인의 손길에 의해 옥상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살짝 열어놓은 현관 사이로 구수한 된장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동대문구 전농동이다. 작은 마당이 있는 아담한 주택이었다. 어머니는 그 작은 마당에서 된장, 고추장 등을 담그고, 겨울이면 김장을 했다. 네 명의 형제들이 놀기에는 마당이 좁았다. 골목길을 누비며 고무줄놀이와 공기놀이, 딱지치기, 땅따먹기, 숨바꼭질 등을 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어머니는 좁은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부지런히 음식을 해 우리들 입에 날랐다. 


연탄불에 노릇하게 눌린 바삭한 누룽지는 고사리손에 들고 다니면서 먹기에 좋은 간식이었다. 부추, 김치, 호박 등 제철 재료로 지져낸 각종 부침개도 지나칠 수 없는 먹거리였다. 그래도 가끔은 소위 불량식품이라는 것에 틈틈이 눈을 돌렸지만 사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꼬마들에게 몸에 좋은 음식이라는 개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남동생을 데리고 목욕탕에 갔다.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 어머니 가방을 뒤져 백 원짜리 동전 5개를 꺼냈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학교 가는 길로 뛰어갔다. 평소 등하교를 하면서 친구들이 달고나 뽑기를 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던 터였다. 다행히 달고나 아저씨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순식간에 달고나 오백 원어치를 먹었다. 뽑기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입에서 설탕 냄새가 진동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다행히 어머니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단것을 많이 먹어서인지 저녁이 되자 배가 살살 아팠다. 걱정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어머니를 보며 난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며 이실직고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가 깔깔깔 웃었다. 그리고 따뜻한 보리차를 건네며 내 배를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열린 현관 사이로 된장 냄새를 맡으며 어린 시절로 돌아갔던 것도 잠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펠리체빌리지 앞에는 난곡마당 간판이 있는 작은 공원이 있다. 잠시 쉬어갈 겸 난곡마당 작은 벤치에 앉았다. 일요일 오전이라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한 아저씨가 난곡마당에 들어섰다.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하더니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난곡마당에 있는 터닝암, 트위스트, 역기내리기, 짐머, 마사지롤을 차례대로 돌았다. 그러더니 벤치를 붙잡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기도 했고 제자리 뛰기를 하기도 했다.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뒤에서부터 동그랗게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아저씨는 내가 떠난 뒤에도 한참을 그곳에서 운동했다. 


고작해야 일주일에 삼 일정도 걷기 운동을 하는 것이 고작인 나를 생각해 봤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세월은 온다. 아직 고질병은 없지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질병이라는 이름이 닥칠지 모를 일이다. 준비한다고 해도 오고, 하지 않아도 온다. 다만 세월의 무게를 견딜만한 마음 체력만큼은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펠리체빌리지를 벗어나니 색다른 이름의 빌라들이 눈에 들어왔다. 편안한 집, 그가 만든 집, 스타하우스,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집 등 다양했다. 문득 그가 만든 편안한 집에서 고단한 몸을 내려놓고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나를 상상만 해봤다. 잠시 상상에서 벗어나 골목길을 빠져나오니 오토바이 한 대가 내 옆을 쌩하고 지나쳐갔다. 골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주변을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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