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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Jun 19. 2023

오전 10시 난곡할매다방에서

골목길 연작 에세이

난곡동은 관악산 방향으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가파르다. 집들 역시 가파른 경사길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 마을버스는 다니지 않는다. 오로지 두 다리 근육만으로 올라가야 한다. 눈이 내리면 빨리 녹을 수 있게 도로에는 열선이 깔려 있고, 곳곳에 작은 의자가 눈에 띈다. 어르신들이 아픈 다리를 잠시 쉬어가라는 배려다. 잘 알지 못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 같았다. 


작은 골목길에 들어섰다. 한 할머니가 텃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할머니 밭이냐고 물었다. 수정연립 땅인데 허락을 해줘서 이런저런 것들을 심었다고 한다. 한 평 정도 되는 땅에 상추, 쑥갓, 부추, 토란 등이 빼곡하게 심어져 있었다. 텃밭 입구에는 합판에 분필로 쓴 안내판이 있었다. 


‘옛날 생각난다. 이런 밭에 부추 농사지어 빈대떡 부쳐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그래서 난 지금도 빈대떡 노래를 좋아한다’고 적혀 있었다. 맞춤법도 맞지 않았지만 하트와 별표 세 개를 함께 그려 넣은 합판에는 ‘빈대떡 신사’ 노래 가사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누가 만들었냐고 물었다. 수정연립에 사는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만들었다고 한다. 재활용을 수집하며 사는 할아버지인데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고 고치는 데 달인이라는 말도 했다. 


A할머니는 수정연립 옆 작은 집에 살고 있었다. 전라도가 고향인 A할머니는 결혼 후 신림7동 판자촌(현재 난향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40년 전에 이곳 난곡동으로 이사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S할머니가 자신의 몸집만 한 박스를 들고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냉큼 다가가 박스를 들었다. 종이컵 1000개가 든 박스였다.   


안 무거워. 

에이, 힘드시잖아요. 어디다 둘까요?

텃밭을 지나 좌측 계단을 올라가면 수정연립 2층이다. 

거기 거기, 의자에 두면 돼.

의자가 놓인 주택 문이 열리고 J할머니가 나왔다. 

뭔 소리여? 댁은 누구여?

언니, 내가 종이컵 사 왔어.


S할머니와 A할머니가 텃밭을 지나 계단을 올라왔다. S할머니는 무릎이 아픈지 계단 난간을 잡고 게걸음처럼 옆으로 올라왔다. J할머니까지 각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언니, 내가 슈퍼 가서 알아보니까 언니가 계산을 하고 하나 안 가져온 거야. CCTV까지 내가 다 봤어. 영수증 여기 있잖어. 두부가 하난데 두 개로 계산했어. 하나밖에 없는데 여기는 두 개 놓고 언니가 넣더라고 봉투에. 대파는 아니고 대파 넣고 두부도 넣어. 

분명 빠진 것도 아니고 와서 본께 두부가 하나여, 근데 두 개로 계산했어. 

언니가 두 번을 담은거여. 거짓말 못혀. 언니 얼굴도 크게 나오고. 

이건 얼마 줬냐? 

9900원이네. 

싸네? 

근데 못 하러 댕겨유? 

아 저요? 글 쓰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여기는 텃밭이 있네요. 요즘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데. 

요즘 도시서 상추 심어 먹는 사람 찾아볼라믄 없지. 여기가 할매다방이야. 

수정빌라 노인 할매 다방이 아름답다고 쓰라구. 매일 아침 10시에 모여. 오후는 자기 맘대로야. 

나 상추 가지고 가서 나 혼자 먹었네. 맛있어. 

모이는 사람이 다섯은 되지? 

어머니가 막내인가 봐요? 

응 맞아. 내가 똘마니야. 한 사람은 작년에 가버리고. 

박스 줍는 양반 혼자 사는 양반 있어. 손재주가 좋아. 모든 다 만들어. 

수정연립 위에는 다 젊은 사람이야. 잘 안 내려와. 용무가 있어야 내려오고. 

저 꼭대기 살다 오고. 재개발된 데. 

집들도 한계 왔어. 애들을 안 낳으니까. 다 각자야. 개나 고양이나 키우고. 

한 아줌마가 관악산 갔다가 잠깐 하는 사이 애기가 없어져버렸대. 몇 살인데요? 근데 알고 보니 개야. 아줌마 개가 애기야? 개는 개지. 나 깜짝 놀랐잖아, 아이 잃어버린 줄 알고. 개 잃어버린 거 10만원 걸었다구. 

나 떡하러 가야혀. 목사님이 쑥이 있대. 

종이컵 이거 월드마트 그릇 파는데 건너편 거기가 싸. 

비 온다 하던가?       


세 명의 할머니가 수다와 대화 그 중간쯤을 오가고 있을 때 J할머니 옆집 문이 열리며 P할머니가 나왔다. P할머니가 가장 말이 없었다. 그저 옆에 앉아 가만히 듣기만 했다. 5시 26분이 되자 P할머니는 동물의 왕국을 할 시간이라며 집으로 들어갔다. 채 2분도 되지 않아 P할머니는 다시 나왔다.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이어진 할머니들의 수다는 정신이 없었다. 이 이야기와 저 이야기가 비빔밥처럼 섞여 있었다. 떡을 하러 가야 한다는 S할머니와 비가 올 것 같다는 J할머니의 말에 할머니들이 부시럭거리며 일어났다. 내일 오전 10시에 커피를 마시러 오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날 저녁 근처에 사는 후배 집에서 빈대떡과 단술을 마셨다. 다음날 숙취로 인해 아침에 난곡할매다방에는 가지 못했다. 다만 떡을 하러 가는 S할머니의 뒤꽁무니를 잠시 쳐다봤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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