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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Nov 16. 2023

할머니에게 인터뷰를 배우다

글쓰기, 그 미친 희망

인터뷰의 시작은 할머니들이었다. 도시에 살면서도 삶의 근간이 되는 흙을 허투루 보지 않는 할머니, 당신에게 허락한 시간을 최선을 다해 버티어왔던 할머니들이었다. 흔히 노인을 생각하면 근력이 없고, 말도 어눌하고, 일도 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하다. 그것이 내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할머니들과의 대화를 마친 뒤에는 그들 인생의 절박함과 애틋함에 기어이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만다. 적어도 누군가를 인터뷰할 용기를 내볼 수 있게 해 준 그녀들이었다.


인천에서 만난 할머니들 중 빼빼할머니가 있다. 빼빼할머니는 몸에 기름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빼빼 말라 ‘빼빼할머니’라 불렀다. 일종의 애칭이며 별명이다.


빼빼할머니는 무속인이다. 마흔 살 무렵 신내림을 받아 무당의 길을 걸었다.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해서 딸을 낳았다. 신내림을 받은 뒤 혼자 나와 살기 시작했고 인생은 늘 질곡의 삶이었다. 이제는 늙어 찾아오는 손님도 없는 법당을 홀로 지키면서도 일 년에 한 번씩 산에 가서 기도하고 온다. 자식이 있으니 같이 살 법도 한데 그녀는 끝내 자존심을 지키며 산다. ‘서로들 신경 안 쓰고 잘 살면 되는 거고 나쁜 일 안 생기면 되는 거지, 무슨 욕심을 바라느냐’며 ‘나 주어지는 대로 순리대로 사는 거야’라고 말한다. 


신랑이고, 애인이고, 자식 같은 담배를 피우는 것과 텔레비전 보는 것이 늙은 무당의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목소리만큼은 누구보다 쩡쩡했다. 두 팔을 앞뒤로 휘적휘적 저으며 몇 발자국 걷다가 뒷짐을 쥐곤 했다. 근력 없는 몸을 지탱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팔을 내저으며 법당 안으로 쓰윽 들어갔다. 


빼빼할머니의 법당은 겨우 사람 한 명이 오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에 위치했다. 햇빛 한 줌도 허락하지 않는 법당에는 익숙한 향냄새가 났다. 대문이자 현관문을 열면 좌측으로 화장실이 있고 바로 법당이다. 우측으로 작은 싱크대와 냉장고가 있는 부엌이 있다. 그녀는 법당에서 텔레비전도 보고, 밥도 먹고, 잠도 잔다. 할머니의 표현대로라면 신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작고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빼빼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녀에게 익숙한 친숙함을 느꼈다. 종교는 없지만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미신을 믿었다. 이를테면 월세방을 빨리 빼야 하는 하는데 한 달이 되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어머니는 가위를 거꾸로 매달아 방문 입구에 걸어두면 된다고 했다. 이틀 만에 방이 계약되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황금색 대변을 두 손으로 받는 꿈을 꿨는데 다음 날 남자친구가 철도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끔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복권을 샀어야 했는데 말이다. 


빼빼할머니의 눈은 나이가 무색하게 빛나고 매서웠다. 다른 이의 간섭이나 흐트러짐을 단 한 오라기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있었다. 다만 어린아이를 볼 때는 무장해제 되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빼빼할머니를 무서워했다. 할머니 입장에서는 온갖 애교로 재롱을 떨어도 허용되지 않았다. 엉엉 우는 아이를 뒤로 하고 할머니는 뒷짐을 쥔 채 집으로 휘적휘적 들어갔다. 


공공예술프로젝트를 하면서 할머니가 거주하는 골목길 도색작업을 했다. 주인의 동의를 구해야 했기에 신청받은 집만 이뤄졌다. 몇 달 동안 우리를 보아왔던 할머니는 당연히 수락했다. 집이 워낙 작아 나 혼자 도색을 했다. 빼빼할머니가 내 주변을 왔다 갔다 하더니 슬그머니 다가왔다. 조끼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었다. 담배였다. 어떻게 알았을까.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눈짓을 해 보였다. 나 무당이야, 하는 것 같았다.


작업이 끝난 뒤 빼빼할머니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할머니 집에서 신할아버지와 함께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할머니는 인터뷰를 하며 고통스러운 기억에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고, 덧없는 웃음을 피식 내뱉기도 했다. 공중에서 하얗게 사라져 가는 담배 연기를 할 수만 있다면 유리병에 담아 밀봉하고 싶었다. 


할머니는 주변 이웃들과 많은 왕래를 하지는 않았다. 속속들이 알고 있으나 모른 척하며 살았다. 그랬던 할머니는 우리가 동네 작업을 하는 마지막에는 작업실까지 찾아왔다. 나는 버선발로 마중 나갔다. 수선스럽게 굴지 말라는 할머니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할머니가 의자에 앉을 수 있도록 하고 따뜻한 차를 드렸다. 할머니는 차를 조금씩 마셨다. 작업실을 둘러보다가 내 사진이 나오면 나와 눈을 마주쳤다. 할머니가 웃는 순간 얼굴 겹겹이 쌓인 세월의 주름이 맞닿았다. 나는 깡마른 그녀의 팔짱을 끼고 시시덕거렸다. 


작업이 끝나고도 몇 번 할머니를 찾았다. 가끔은 기도를 드리러 가 허탕을 치기도 했고, 때로는 이웃들과 길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를 볼 때도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인천을 떠났고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그날은 빼빼할머니를 생각하며 향을 피우고 소주를 마셨다. 


사람들은 자신이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며, 말하고 싶은 것만을 말한다. 그러나 타인이 하는 말에 온 힘을 다해 귀 기울이고,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봐야 하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 전에 타인이 하는 말을 먼저 들어야 한다. 첫 인터뷰에서 내가 배우고 익힌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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