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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Dec 14. 2023

미칠 만큼 재미있지는 않다

글쓰기, 그 미친 희망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였다. 운전기사는 정차 전까지 마스크를 절대 벗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모니터에서는 뉴스 채널이 고정되었다. 버스가 달리는 고속도로는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있을 것이다. 머리 위 에어컨에서 나오는 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냉기가 전해졌다. 어쩌면 밖으로 쏟아내는 습하고 더운 공기가 아스팔트를 더 뜨겁게 달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북유럽의 폭염을 알리는 뉴스가 나왔다. 마침 28년 동안 지역에서 환경운동을 했던 L을 만나 인터뷰를 마친 뒤였다. 


이제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L은 산업현장에서 안전관리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혹시 몰라 취득한 자격증이 도움이 되었다며 L이 웃었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 치아 한 개가 빠져 있는 그는 육십 대 초반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우연한 계기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L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고향 주변에는 굵직한 환경문제들이 연이어 터졌다.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도 저조할 때였다. 밤사이 신고 전화가 연이어 들어왔고 지역에 있는 이들과 문제를 해결해 갔다. 그 과정에서 테러도 당하고 욕도 먹었다. 농성장에서 텐트를 치고 자던 L을 그대로 돌돌 말아 나무에 묶어 매달기도 했고, 용역업체가 뱉어낸 침에 안경이 뿌옇게 되어 앞이 안 보이기도 했다. 활동가이니 가난하게 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타인의 시선을 받기도 했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했다. 세끼 해결하기가 어려웠고, 가스도 끊겼다.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먹고살아야 하는 생계 문제로 인해 누구도 시민운동에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L이 오랜 시간 시민운동에 몸담았던 이유가 궁금했다. L은 미치지 않으면 못 한다고 했다. 또한 공익성에 대한 신념, 도덕성과 투명성을 지켜가는 의지가 자신을 지켜온 힘이라고 했다. 2년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그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며 재미있게 잘 놀았다고 한다. 그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고난의 행군이었고, 자신처럼 이 일을 재미있게 즐겼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아도취라고 말하는 L은 오늘 못 지키면 내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시민운동을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그 시간들이 그저 젊음이라는 말로만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자본의 논리로부터 지역을 지켜내고, 개발의 논리를 막아내고 저지했던 그 고난의 과정에서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믿음이 아닐까. 세상에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믿음 말이다. 토지의 박경리 작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왜 삶의 문화를 원하고, 쉼터를 원하는데 조경시설과 놀이터로 만드는가. 왜 삶의 복원을 원하는데 개발을 하는가?”


L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나의 선배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흔히 386세대라 지칭되는 이들에 대한 질타가 이어지는 요즘이다. 꼰대로 치부되며 업적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본 그들은 아직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실천 방향을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도 못했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축적하는 일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끝내 현장을 지켰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L만 만난 것은 아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혹은 연고 없는 지역에서 최소 20년 이상 시민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신념으로 무장한 이들이었다. 신념은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신념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나의 신념은 무엇이었나를 자조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다. 현장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모든 선배들에 대한 경외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L은 미쳐야 한다고 했다. 미칠 만큼 재미있는 일. 과연 나에게 글쓰기는 그러한가를 질문한다. 재미있지는 않다. 오히려 쓸수록 두렵다. 무엇을 위한 쓰기인지 자문하는 일은 수행의 과정과도 같다. 미칠 만큼 몰입하지도 않는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보다 잡생각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기 일쑤다. 그래서 나는 정정하기로 했다. 미칠 만큼 재미있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찾는 일이라고.


한창훈 작가는 ‘문학을 키우는 것은 비문학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양귀자 작가의 ‘문학보다 삶이 먼저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비문학적인 삶을 듣고 써내려 가는 일, 그것이 현재로서는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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