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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Jan 06. 2024

그녀의 주어는 여공이었다

쓰지 못한 말들-글쓰기 그 미친 희망

얼마 전 방적공장에서 일했던 여공들을 만난 적이 있다. 1970년대 산업화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은 외면당했다. 그중에서도 봉제공장과 방적공장은 최악의 조건이었다. 솜에서 실을 생산하니 먼지와 기계에서 나오는 소음으로 인해 목소리는 저절로 커졌다. 봉제공장에서는 실밥을 뽑아내고 미싱을 돌리니 한 사람이 겨우 움직일 수밖에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웅크리고 일했다. 그때는 모두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 당연함에 질문을 던진 이가 전태일이었다. 


여공들을 만나러 다니며 나는 자연스럽게 전태일을 떠올렸다. 1988년 어느 봄, 딱 3개월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전자부품을 조립하는 일이다. 정해진 부품을 꼽기만 하면 된다. 단순한 일이다. 지루했다. 졸음이 밀려왔다. 빠르게 움직이는 컨베이어벨트를 따라가지 못하면 반장의 질타가 이어졌다. ‘죄송합니다’를 외치며 이미 단물이 빠져버린 껌을 소리 내어 씹는다. 순간 모던타임스의 찰리 채플린이 생각났다. 콧수염의 찰리가 멜빵바지를 입고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부속품을 조이며 따라가는 과장되고 익살스러운 모습은 차라리 헛 슬픔이었다. 


공장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먹기 어려웠다. 국통에는 비린내 나는 고등어가 된장과 함께 둥둥 떠다녔다. 튀기거나 조림으로만 해 먹는 줄 알았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고등어만 회로 먹는다. 된장을 넣었어도 국에는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다. 대접에서 손길을 잃은 내 손은 휘이 내젓기를 반복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은 아직 나에게 사치인가,라는 생각에 잠시 절망하기도 했다. 


공장 문을 나서며 아쉬움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함께 일하던 내 또래의 여공들과 포장마차에서 먹던 떡볶이와 어묵만은 선명한 기억의 맛으로 남아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이제 스무 살이 된 여공들은 고향과 가족 이야기로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누군가는 찔끔 눈물을 비치기도 했다. 어쩌면 다시 돌아가야 할 단칸방의 비애와 떡볶이의 매운맛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제 육십 대가 된 여공들은 거의 대부분 열다섯 살이나 열여섯 살에 공장에 취업했다. 방적기에 신장이 맞아야 하니 면접에서 신체검사는 필수였다. 신장이 153~155cm가 되지 않으면 실격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공장에서 일했다. 기숙사는 벽면에 옷장이 일렬로 있고 여공들 8~12명이 이불을 깔고 일자로 누워 자는 구조다. 물도 잘 나오지 않아 샤워를 하려면 기다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일은 야간조에서 근무할 때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 어려웠다. 반장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며 찬물로 세수하고 온다. 그렇게라도 졸음을 이겨내지 않으면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더구나 공장 내부는 솜을 실로 만드는 일이라 더웠다. 여름에는 밖의 온도나 실내 온도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 방적기가 가동되는 공장 평균 온도는 30~34도다. 


대략 한 사람이 방적기 60여 개의 추를 관리한다. 기계는 쉼 없이 돌아가고, 여공은 기계 속도에 맞춰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야 한다. 집중하지 않으면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3교대로 근무하는 이들에게 따로 점심시간은 없었다. 10분 내로 후다닥 먹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다음 사람이 교대로 식사할 수 있다. 화장실 가는 시간도 없다. 반장이나 조장에게 눈치껏 이야기하고 뛰어갔다 와야 한다. 정규 근무 이외 간혹 잔업이 있을 때도 있다. 잔업은 보통 2~4시간이다. 야간에 근무할 때 잔업을 하게 되는 날은 더 피곤할 수밖에 없다. 방적공장 특성상 먼지와 소음은 피할 수 없었다. 솜에서 실을 뽑아내는 일이기에 여공들은 머리부터 옷에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썼다. 변변한 마스크도 없었다. 


사고도 많았다. 일 년 중 명절을 제외하고 방적기는 쉰 적이 없다. 노동자들의 피곤함과 고단함은 기계 앞에서 무력할 뿐이었다. 당시 노조 지부장을 했던 K씨는 이제 일흔을 훌쩍 넘기 나이가 되었다. 어용노조였지만 앉은뱅이라도 노조는 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노동자들의 편에서 일했다. K씨 역시 기계에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 나갔다. 소주잔 잡을 때가 제일 불편하다고 말하는 K씨를 보며 그와 소주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위암으로 술을 끊었다고 했다. K씨는 열일곱 살 어린 여공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솜이 들어오는 첫 공정인 혼타면(입고된 솜을 실로 만들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일하던 어린 여공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갔다.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는 갈비뼈와 가슴까지 파고들었다. 여공은 과다출혈로 즉사했다. 병원으로 간 K씨는 여공의 부모에게 시신을 보지 말라고 했다. 대신 책임지고 잘 보내주겠다고 했다. 회사에서 지급된 20만 원을 염습하는 이에게 주며 부탁했다. K씨도 함께했다. 피로 달라붙어 있는 팬티를 벗기니 채 마르지 못한 핏물이 얼굴에 튀었다. 최대한 깨끗하게 해서 보내주고 싶었다. 가지고 있는 솜을 모두 쓰고도 솜은 모자랐다. 부모가 기억하는 열일곱 살 딸의 얼굴만은 추억으로 간직해 주고 싶었다고 한다.


지금은 당연하다 생각되던 것들이 그때는 그냥 그런 일로 치부되었다. 노동 현장에서 죽어 나간 여공들에 대한 애도도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기록함으로써 여공들을 잊지 않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그녀들의 주어가 여공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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