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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Mar 06. 2024

생존의 글쓰기

쓰지 못한 말들- 글쓰기 그 미친 희망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 배우려 몇 번 시도했지만 번번이 성공하지 못했다. 물장구를 쳐도 꼬르륵 가라앉기 일쑤였다. 그래서인가 바다는 내게 두려움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내게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인천의 작은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곳은 ‘떼무리’라 부르는 소무의도다. 대무의도에서 떨어져 나와 작은 섬이 되어 ‘떼무리’라고도 하며, 고기 떼가 무리 지어 다닌다고 하여 ‘떼무리’라 부르기도 한다. 4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섬은 한 바퀴 둘러보는데 1~2시간이면 충분하다. 마을회관을 지나면 깔딱 고개다. 고개를 중심으로 ‘이 너머’, ‘저 너머’라 주민들은 부른다. 


광명 선착장에 도착하면 소무의도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다. 차는 들어가지 못한다. 오로지 사람만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다. 2011년 개통된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배를 타고 육지를 건너  다녔다. 섬으로 시집온, 지금은 80대가 된 할머니들은 매일 밤 육지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간혹 모두가 깊이 잠든 밤,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서면 뉘 집 며느리 아무개가 도망간다는 소문이 금세 났다. 육지로 가고픈 발걸음을 돌려 다시 시댁으로 와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육지로 나가지 않았다.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고, 남자들이 잡아온 생선을 손질해서 팔았다. 하염없이 세월만 가고 나이만 먹었다. 


새우잡이와 조기잡이로 부유했던 섬은 이제 꽃게잡이를 한다. 간혹 바다 낚시꾼들을 태우고 배를 운행하기도 한다. 통장님이 운영하는 배를 탄 적이 있다. 생전 처음 낚시를 해 봤다. 작은 막대에 미끼를 걸고 바다에 던져놓고 막대를 조금씩 위에서 아래로 움직인다. 무언가 묵직함이 느껴졌다. 박대다. 펄떡거리는 박대를 그 상태 그대로 통장님에게 되돌려 드렸다. 생선가게에 얌전하게 누워 있는 생선만 보던 나에게 그 생생함은 조금은 낯설었다. 대신 할머니들과 갯벌에 나갔다. 


아침 해가 뜨기도 전, 할머니들이 모자를 쓰고 장갑을 낀 채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나는 한 할머니가 건네준 장화만 덜렁덜렁 들고 배를 탔다. 거친 파도에 배는 심하게 흔들렸고 기름 냄새로 인해 속이 메스꺼웠다. 빈속이니 게워낼 것도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배 난간에 의지한 나를 보며 할머니들이 깔깔 웃었다. 좀 있으면 도착하니 참으라고 했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10여 분 정도 지났을까. 순간 배 엔진이 멈췄다. 배에 탄 사람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3분 정도 지났을까. 순식간에 바닷물이 빠지면서 검푸른 모습이 눈앞에 드러났다. 자연이 인간에게 허락한 길, 갯벌이다.


배에 탄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사다리를 타고 하나둘 내려간 사람들 손에는 바구니와 호미가 들려 있고 등에는 배낭을 메었다. 우리가 타고 간 배 이외 서너 척의 배에서 내린 사람들까지 모두 쪼그리고 앉아 바지락을 캤다. 검푸른 갯벌 위 작은 점 같았다. 질퍽한 갯벌 곳곳이 조개 천지였다. 나에게도 호미를 내주며 캐라고 했다. 딱 먹을 만큼만 캤다. 


어디선가 뱃고동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서둘러 배로 간다. 조만간 물이 들어온다는 신호다. 순식간에 불어난 물이 배를 흔들었다. 바구니에 담긴 바지락을 배낭에 쏟아 넣고 장화에 묻은 뻘을 털어낸다. 또 다른 가방에서 보온병에 담긴 믹스커피를 마시며 내게도 권한다. 세상 달콤한 맛이다. 


다시 육지에 발을 딛는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고 나도 숙소로 돌아와 대자로 누웠다. 잠깐 눈을 붙이고 밖으로 나오니 할머니들은 그새 바지락을 손질하고 있다. 한 할머니 옆에 가 앉았다. 할머니는 얼마 전 돌아온 아들 부부와 살았다. 성공하겠다며 육지로 나갔던 아들은 사업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배를 탔다. 할머니는 마뜩잖았지만 돌아온 아들의 등을 떠밀 수는 없었다. 아들은 묵묵히 배를 타고 그물을 손질했다. 검게 그을린 아들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섬에 살고 있는 결혼한 남자들 대부분은 갈매기 아빠로 살아간다. 학교가 없기 때문이다. 무의분교는 문을 닫은 지 오래다. 아빠는 섬에 남아 바다에 나가고, 아내는 아이들과 아스팔트 위에서 살아간다. 할머니의 아들 역시 갈매기 아빠다. 


주말이 되어 온 가족이 밥상에 앉는 날, 할머니가 밥을 먹으라고 불렀다. 말린 박대구이와 바지락을 넣은 된장찌개, 며느리가 육지에서 사가지고 온 불고기가 밥상에 올랐다. 할머니는 작은 텃밭에서 키운 상추를 뜯어내고 직접 담은 된장을 듬뿍 퍼 올린다. 낯선 이방인이 동석한 밥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섬이 여자에게는 힘든 곳이라고 했다. 일명 ‘마도로스’라 부르던 뱃사람 남편들은 한번 배를 타고 나가면 감감무소식이었다. 여자들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남편을 집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다. 하늘 한번 보고, 바다 한번 보며 살아냈다. 외로움을 등에 지고 적막한 시간을 통과했다. 이제는 익숙해져 육지에 나갔다가도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나는 어땠을까. 천명처럼 여기며 이것도 나의 삶이라 여기며 견디며 살았을까. 적막과 고독을 버티는 그 시간들이 순간적으로 내 온몸을 잠식해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 섬에서는 그 혹은 그녀 모두가 저마다의 삶을 하염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섬과 갯벌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며 그 어떤 글이나 문장으로도 그들의 지엄한 현실과 생존을 넘어서지 못할 뿐이라는 사실에 나는 그저 무기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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