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못한 말들-글쓰기 그 미친 희망
모르는 번호였다. 전화를 받으니 점잖아 보이는 어른 목소리다. 문화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용건은 예산학 강좌를 예정 중인데 나에게 강의를 해달라는 거였다. 당황했다. 심지어 나는 예산에 거주하지도 않았다.
-예산 사람도 아니고 제가 예산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요?
-선생님이 쓴 사라진 기억, 오래된 현재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 그거였구나.
지난해 예산군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외주 작업으로 진행된 책이었다. 예산읍내 사라졌거나 오래된 장소 혹은 가게들을 취재해 글과 그림으로 묶어낸 책이다. 그래도 예산학 강좌를 진행하는 일은 부담스러웠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취재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나 책 이야기를 중심으로 가볍게 풀어내도 되겠냐고 했다. 문화원장은 편하게 진행하시면 좋겠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의가 진행되는 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책 다섯 권을 들고 갔다. 나이 지긋한 중년 23명이 자리를 채웠다. 내가 제일 젊은것 같았다. 민망했다. 준비해 간 자료에는 텍스트보다는 흑백사진 수십 장이 있었다. 취재를 하며 수집한 사진들이다. 읍내라는 제한된 공간이다 보니 예산에서 태어나 살았던 사람이라면 기억 하나쯤은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외로 중년의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부끄러워했다.
-예산농업학교 졸업하신 분?
물어도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문화원장만 손을 들었다. 빨리 손 들어, 라는 문화원장의 재촉에 마지못해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 뒤로는 손 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말을 잘해 줄 것 같은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반응이 나오길 기다렸다. 30분 정도 지나니 편안한 분위기가 되어서일까. 한 남성분과 여성분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예전에 그랬었다는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서너 분이 나에게 다가와 그곳이 여기서 보면 어디라는 둥, 책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등의 질문을 했다.
두 시간이 마무리되고 한 분은 책을 가져와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너무 재미있고 옛날 생각을 하게 해 준 시간이었다고 했다. 고맙다고 했다. 판매용 책은 아니지만 기억이 기록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가져간 책 다섯 권 중 한 권은 문화원장에게 드렸고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두 권을 누군가 가져갔다. 한 권은 간절하게 그 책을 구하고 싶다는 분에게 드렸다. 한 권이 남았다. 세 명이 손을 들었다. 결국 가위바위보로 정했다. 가위바위보에서 승리한 남성분은 만세를 부르며 꾸벅 인사를 하고 갔다.
예산군도시재생지원센터 센터장은 책이 발행된 후 나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작가님의 사라진 기억 오래된 현재를 읽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억을 찾아냈을까 하는 신기함에서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멈춰버린 현재에 대한 아쉬움으로 변화합니다. 그럼에도 희망으로 마무리되는 이유는 좋은 사람들과 이를 찾아낸 작가의 따뜻한 마음일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을 기초로 예산학이라는 과목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독립운동, 다문화, 산업과 문화예술이 공간 속에 녹아 있다면 후손들에게 더없이 좋은 교육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과분한 칭찬이다. 후손에게 무언가 남기기 위해 썼던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의 기억을 따라는 일은 나와 우리의 과거를 반추하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동력이 되어주는 일이기도 하며, 앞으로 살아갈 나의 근간이 되어주는 일이다. 그리하여 오래된 현재가 쌓여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될 것이다. 언젠가 나는 사라지겠지만 기록은 남는다’는 마음으로 썼다.
나의 글쓰기가 절대 타인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누가 감히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글이 인간의 삶보다, 노동의 현장보다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아픔과 슬픔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 기쁨과 절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일이 글이라고 믿는다. 만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글이 그 단서를 제공할 뿐이지 않을까. 나의 시선은 늘 사람에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