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못한 말들-글쓰기 그 미친 희망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다. 가정집 마당에 개집과 토끼집이 있었다. 어미 개는 새끼 4마리를 낳았고 토끼 두 마리가 새끼 10마리를 출산했다. 주인이 개집을 들여다보니 강아지보다 귀가 큰 토끼가 강아지들 사이에서 힘겹게 젖을 빨고 있었다. 토끼장 구멍으로 빠진 새끼를 어미 개가 물어와 자신의 새끼로 기른 것이다. 강아지가 낳은 새끼는 검은색 2마리와 밤색 1마리, 얼룩무늬 1마리인데 토끼 새끼가 검은색이어서 자신의 새끼인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어미 개는 토끼 새끼를 다른 곳으로 내어놓으면 다시 물어와 핥았다. 10일 뒤 강아지들보다 체구가 작았던 검은색 토끼는 점점 자라는 강아지들에 밀려 밤사이 깔려 죽었다. 어미 개는 죽은 토끼를 내어놓고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고 주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강아지와 토끼의 기묘한 동거는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지역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한 제보자에 의해 작성한 기사였다. 2회에 걸친 기사로 강아지와 토끼의 동거가 먼저였다. 주민들의 반응은 다른 기사보다 폭발적이었다. 회사로 전화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온라인에 댓글 수백 개가 달렸다. 댓글 대부분은 동물의 모성 본능에 대한 신기함과 뜻하지 않은 격려였다. 10일 뒤 발행된 토끼의 죽음 관련 기사에 독자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글에 대한 피드백을 가장 많이 받은 기사였다. 정치도, 경제도 아닌 강아지와 토끼의 동거라니.
지역신문은 일간지와는 조금 다르다. 일간지 기자들은 선배들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고 들었다. 정치부, 경제부, 문화부 등으로 구분되어 근무한다. 그 분야의 베테랑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역신문 기자는 그 지역의 역사를 포함해 모든 분야를 섭렵해야 한다. 1~2명의 기자가 일주일에 한 번 발행하는 지면을 채워야 한다. 서울만큼 매번 사건 사고가 발생하지도 않는다. 지역적으로 민감한 사안도 별반 없다. 그래도 간간이 기자들이 허덕이지 않도록 이슈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각종 봉사활동이나 지역 내 훈훈한 미담을 찾아 동분서주해야 한다. 흔히 지방에서는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좁은 동네다. 좁은 동네에서 파도 파도 나오는 미담은 없다. 대신 나는 길 위의 사람들을 종종 만났다. 시골 버스에서 만난 약장수, 교회에서 비 오는 날 프라이팬에 노릇하게 지져내는 길거리 부침개, 마을 입구 땡볕에 앉아 고사리를 말리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 폭설을 뚫고 마을회관으로 가는 할아버지 등이 주인공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만남이 있다. 읍내를 지나다가 박스 줍는 할아버지를 봤다. 지금이야 흔한 풍경이지만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박스 줍는 노인을 보기는 어려웠다.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할아버지, 라고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는다. 허리를 굽히고 박스를 리어카에 싣는 할아버지의 여린 어깨를 톡톡 쳤다. 그제야 할아버지가 돌아보며 빙그레 웃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청각장애인이다. 할아버지는 왼쪽 팔에 장애가 있다. 결혼한 지 30년 차 된 부부다. 면 단위에 거주하면서 품팔이를 했다. 10년 전 읍내로 이사 오면서 박스 줍는 일을 시작했다. 새벽 5시부터 시장 주변을 돈다. 한 군데 모아둔다. 오후 3시쯤 되면 양이 제법 된다. 리어카에 할아버지 키보다 높이 박스를 쌓는다. 박스를 보관하는 창고로 가기까지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할머니는 다른 곳에서 박스를 모으고 있을 것이다. 창고에 박스를 내려둔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찾으러 다시 리어카를 끌고 간다.
원래는 여기까지였다. 할아버지를 만난 뒤 상가 탐방을 갔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할아버지 집 근처 상가였다. 상가 주인이 할아버지 칭찬에 입이 마르지 않았다. 박스를 정리하면서 주변까지 깨끗해졌다는 얘기였다. 더불어 조만간 무료 결혼식을 할 것이라는 소식까지 전해주었다.
결혼식 당일 할아버지는 은회색 양복에 검은색 나비넥타이를 하고 멋쩍게 웃었다. 양복은 할아버지에게 너무 커 보였다. 할머니는 드레스 자락에 자꾸만 발을 밟혔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가 손을 잡아준다. 맞절을 하라는 주례의 말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머리를 쿵 찧는다. 하객들의 웃음보와 박수가 터진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할머니가 급하게 나간다. 박스 줍는 일보다 더 힘든 결혼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당시 썼던 기사들을 지금 읽어 보면 부끄러운 문장들이 많다. 그럼에도 그때 작성한 기사는 배고팠던 문장이었다. 박봉의 기자 월급을 받으며 기사를 썼다. 기자로서의 신념보다 지역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기 위해 뛰어다녔다. 단순히 지금보다 젊었으니까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화려한 문장보다 배고픈 문장이 더 강렬했던 때였다. 무엇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