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레드룸 전시회, 그리고 무드 인디고
나는 사랑에 조금 진심인 편이다.
어떤 사랑에 진심이냐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랑에,
다양한 모습을 한 개체들이 나누는 사랑에,
익숙함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는 사랑에,
그리고 모든 것을 태울만큼 뜨거운 사랑에!
서촌 그라운드시소에서 사랑에 관한 전시가 있다는 소식에,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다녀와보았다.
왜 우리의 뇌는 어떤 순간들을 단편적으로 사진처럼 기록하는가. 스쳐가는 맞닿았던 순간들 (눈길이든, 입술이든, 무엇이든.)을 기록하는 사진은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전시를 다녀오고 나서 며칠 뒤 "무드 인디고" 영화를 봤다. 영화에서는 거품 (foam)과 같은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게 전시에서도 말하고 있는, 사랑의 실체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매달리는 사랑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며 우리는 사랑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주는 부가물, 감정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곳에 존재하는 사랑에 어떻게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시작하기도, 모든 것을 끝내기도 한다는 사실이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과연 어떤 감정이 우리를 그렇게 상반되는 결과로 밀어 넣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사랑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그만큼 강력하고 무서운 감정을 껴안고 있는 나, 그리고 모두에게 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랑을 시작했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을 하려는 이유도 분명히 안다. 난 사랑을 할 때 스스로를 더 사랑하게 된다.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아껴지고 예쁨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느끼는 것이다.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상대의 눈동자에서, 나보다 더 조바심 내며 나의 시간을 존중해 주는 모습에서, 함께 코를 찡긋거리며 표정을 따라 하는 순간에서. 순간순간이 따뜻한 글의 한 구절처럼, 부드러운 색감을 가진 그림처럼, 기억에 저장되어 내가 무너지려 하는 순간마다 날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거다.
물론 언젠가 사랑은 희미해지고 말 거다. 지금의 온도를 그대로 유지하길 비는 것은 종교에서의 맹목적인 사랑이 아닌 이상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에게, 상대에게 실망하니까. 전시에서도 사랑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 모든 단계를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앞의 모든 황홀함을 한순간에 앗아갈 정도로 끔찍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처음의 강렬했던 시간, 화려했던 색감, 뜨거웠던 온도가 가져다줬던 황홀함을 잊지 못해 계속 사랑을 하는 게 아닌가.
첫 번째 전시를 만든 스텔라 작가가 얘기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방금 이별을 맞은 이에게 서로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 불타는 연인을 보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얄밉고 부러움에 가득 차는 동시에, 자신이 사랑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행복해지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사랑에 의해 상처받고, 찢어지면서도 사랑을 보며 치유받는다.
그렇기에 비록 커플만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사랑에 의해 무너진 이들에게 더욱 추천하고 싶은 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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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웠던 점
전시의 소개에서는 다양한 모습의 사랑을 보여준다는 식의 설명이 있었으나, 실제 전시에선 거의 대부분 사회에서 "전형적"이라고 여겨지는 연인의 모습밖에 없어 아쉬웠다. 혁오가 얘기하는 사랑의 모습을 기대한 건 나의 욕심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