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권태는요?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재미에 빠졌다. 특히 좀 시간을 두고 다시 읽었을 때, 내가 기억하던 내용이 아니어서 놀라움을 맞닥뜨리는 일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만큼 내 생각도, 마음가짐도 자랐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난 좋아한다는, 사랑한다는 감정에 대해서는 무지에 가까운 상태였다. 단순히 얼굴을 붉히는 것에 좋아한다고 말하고, 일상 속 가볍게 지나가는 순간들에 사랑을 투영했다. 여전히 어리지만, 그때는 더 어렸다. 책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년을 보낸 나는 지금도 두려움 많지만, 그때보다 사랑을 좀 더 안다. 단순히 누군가의 곁에 있다고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걸. 그리고 각각의 사랑은 다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내 기준으로만 재단할 수는 없다는 걸. 그럼에도 나의 사랑을 내딛는 데는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지쳐한다. 그래서 오히려 폴의 권태와 안정 사이 줄타기에 더 공감된다. 우리는 누구나 정체되어 있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도전을 겁내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상처 내는 선택을 더 즐겨하는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서조차 온전히 주인이 되지 못한 채 방관하고 흘러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정말로 그런 상태에 놓여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변하지 않으면 이대로 휩쓸리다 끝을 맺을 것 같은 기분을 받으면서도 지금의 상태에서 하나라도 엇나갔을 때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아 멈춘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사람들의 눈과 입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고, 자금 사정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머릿속의 불타오르는 열정이 정말로 내가 가진 열정이 맞는지 의심스럽게 된 것이다. 세상과 동떨어지지 못한 채 둥둥 떠다니다 억지로 가진 꿈은 아닌지. 그러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탓에 오히려 더 헤매게 된다.
헤매기만 하면 다행이다. 쓸데없는 투정까지 같이 늘어나는 게 문제이다.
사실 인간은 숨을 쉬지 않고도 꽤 오래 버틸 수 있다. 숨이 고프다 느끼는 건 이산화탄소를 뱉고 싶다는 착각일 뿐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그 순간에도 혈액엔 산소가 충분해서 버텨낼 수가 있다는 거다. 뱉고 싶다는 욕구만 잠시 버텨내면 그다음엔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이 편함을 느낄 수 있다는데, 하지만 나는 그 잠시를 견뎌내지 못해서 숨 가쁘게 내뱉고 만다. 그리고 자주 혼자 가슴을 끌어안고 누워 뒹군다. 숨을 아무리 크게 내뱉어도 빠져나오지 못한 공기가 온몸을 탁 막아서, 체한 것처럼 답답해져오기도 한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느끼는 괴로움, 아픔, 슬픔은 모조리 착각일 수 있다. 어떻게든 뱉고 싶다고 착각하며 부리는 투정. 투정이 끝나면 그냥 모든 움직임이 멈춘 내가 남을 텐데 아직은 다 뱉지 못해서 생각에 잠겨 산다.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눕는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누워 뒹구는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매너리즘이 제일 싫었는데, 요즘엔 매너리즘 추구자가 되어간다. 새로 마주한 곳에서 느낄 두려움이 싫어서 자꾸 같은 일상 속에서 나른함을 느끼려고만 하는 것 같다. 이러면 안 되는 시기에 이런 감정이라니.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실에 스스로를 옥죄고 불평하고. 다른 이의 한숨을 들이마신 뒤에 다시 한숨으로 내뱉고. 발상의 전환이 안 된다. 부정이 부정을 끌어안고, 점점 커지고, 매일 나에게 굴러오는 듯하다.
정체된 때에, 읽는 책은 새로운 물음을 던져주고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채찍질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그렇다. 폴은, 20대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나보다 더 회의적인 생각을 안고 있었다. 그에게 시몽이 던진 질문은 커다란 파장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누군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 묻는다면 재즈를 좋아하고, 느린 템포의 곡을 즐겨 들으며, 힙합은 즐기지 않는다고 답하겠다. 그러나 나의 대답에 대해 누군가가 귀를 기울여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고, 이 답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게 맞긴 하는지 묻게 된다. 정체되어 있던 폴에게 시몽은 새로운 궁금증을 안겨주는 이었다.
폴은 시몽과 함께할 수도, 로제와 함께할 수도,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중에서 로제와 함께하는 길을 택한 것은 사랑이 언제나 불타오르는 모습으로만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드러낸다. 멀어져 가는 시몽의 뒤에서 자신이 늙었다는 변명을 던져내는 폴의 모습은 어쩌면 나의 모습 같기도 하다.
시간이 감에 따라 불가능한 일은 점점 많아지고, 지금의 난 시몽을 떠나보내고 있다.
단순히 어떤 일을 시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계에서의 두려움은 더 크다. 두려움이 큰 이유는 내가 언제나 그들에게 애정을 쏟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폴이 그랬듯이 나는 산책의 동반자든 인생의 동반자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애정을 느꼈다. 그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렇기에 언젠간 떠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좋은 이들을 점점 더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서 누군가 그래도 나를 찾아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모두가 나를 떠나 자유를 찾기를 바라면서도, 세상에 굴레 없이 내던져진 이들이 영영 나를 잊을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두려움을 넘어서 오는 책임과 부담이 가지는 무게를 알기에 쉬이 결정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 그렇게 보낸 수많은 기회와 수많은 사람.
프랑수아즈 사강은 권태를 택한 폴을 통해 묻는다. 시몽을 내쫓을 거냐고. 시몽의 뒷모습을 기쁨에 뛰논다고 합리화할 거냐고.
스물다섯조차 되지 못한 나는 미래를 준비하느라 현재를 망치는 그 자체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사랑을 열렬히, 매일 바치지는 못하더라도, 사랑을 쏟을만한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나는 분명히 나 스스로가 어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면서 이중적으로 늙었다고 생각하며 지금의 권태를 위안한다. 날이 갈수록 커지는 자존심에 스스로가 잡아먹히지 않고, 적어도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잊고 사랑해본 적이 있다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장난꾸러기 시몽, 무모해 보이던 그조차도 이불속에서 숨죽였던 모습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뒤나 앞을 돌아보거나 내다보지 않는 선택과 일상은 불가능한 것 같기도 하다.
가끔 내가 들이마시는 공기가 누군가의 한숨이라는 생각이 든다. 숨이 흐르는 것에만 제대로 집중해보면, 한쪽 손가락 끝에서, 반대쪽 손끝까지 숨은 흘러나오고, 이렇게 내 몸을 타고 나간 공기들은 또 누군가의 몸 안에 들어가서 돌겠고, 누군가의 한숨이 되어 나오겠고. 그리고 한숨들이 섞여 덩어리가 되겠고.
그렇게 사실 공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의 한숨 덩어리인 거고. 이렇게 한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 혼자 나약하게 남아있는 게 싫다. 투정 부리기보단 한숨 한번 크게 내뱉고 다시 나아가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단단한 어른. 아니면 아예 한숨조차 내뱉지 않는 굳건한 사람이 되고 싶다. 툭툭 털고 일어나는 굳건함.
잘난 사람이 가득한 세상에서 난 살아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