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뒤의 여성들의 이야기
예전에 미술관에 여성이 피사체로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영상 업계에서도 여성은 오랫동안 피사체로만 여겨졌다. 어쩌면 아직도 그럴지도 모른다. 여성이면서 '영상을 한다'라고 하면 연기자나 인플루언서 정도를 쉽게 떠올리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렇게 수려한 외모가 아님에도 영상을 한다고 하면 '출연(연기/배우)을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물론 영상에 출연하는 여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수려한 외모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가 영상을 한다고 할 때 촬영, 조명, 음향, 편집, 연출 등 수많은 직군 중에서 카메라 앞에 선 직군을 떠올리는 것은 분명 젠더에 기반한 편견으로 인한 말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기획하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있고, 남성과 능력 차이가 없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언제가 되어야 상식이 될까? 궁금해하면서, 한 사진전에 다녀왔다. 여성 영상인 네트워크인 프프프(FFF, Feminist Filmmakers Forever)에서 기획한 <카메라 뒤의 여성들>이었다. 나 역시 10년 차 영상인으로, 프프프 멤버로 활동을 시작한 지 이제 막 1년이 되어간다. 일과 사이드 프로젝트가 모두 바빠 자주 얼굴을 비추진 못 해도 참여할 수 있는 활동들에 참여하고 있다.
여성 영상인 사진전에 가는 마음은 솔직히 복잡하고 답답했다. 프프프 멤버들이 기획하고 친한 동료들이 사진 공모도 한 전시니까 뜻깊고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전시가 필요한 세상에 대한 불만이 끓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 '여성' '영상인'들의 사진을 전시해야 하는, 동시에 남초인 영상업계에서 '페미'로 낙인찍혀서는 안 되는 이 기울어진 세상에 멀미가 나듯 속이 뒤집혔다. 대체 왜, 여성 영상인은 네트워크까지 만들고 사진전까지 열어야 할 만큼 비가시적인 존재일까? 언제까지 이렇게 기울어진 세상에서 영상을 만들어야 할까? 얼마나 많은 여성 영상인이 생기고, 얼마나 많은 영상을 만들어야, 이 차별이 끝날까? 마음 속에 수많은 '대체 언제까지?'라는 질문을 달래면서 전시장에 들어갔다.
전시장에서 여성 영상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뒤집어졌던 속이 조금씩 잔잔해짐을 느꼈다. 방한용품으로 잔뜩 감싸고 핫팩을 나눠가져도 몸이 얼어붙은 추운 현장, 열악하고 좁아서 옹기종기 모여서 모니터 뒤에서 숨죽이고 있는 연출부, 무거운 장비와 주머니가 많은 촬영팀 바지에서 느껴지는 카리스마, 복잡하고 바쁜 스케줄과 연출 고민이 어지럽게 기록된 종이 뭉치들, 편집에 푹 빠진 눈동자, 피곤해 곯아떨어진 이들을 다정한 시선으로 찍어둔 사진들, 그리고 매 순간 서로를 믿고 몰입하는 이들... 여러 사진을 구석구석 구경하며, 어느새 마음속에 뭉쳤던 응어리는 풀어졌다.
과거 어느 순간의 나와 닮은 모습들도 있었고, 언젠가 저런 현장에서 함께하고 싶다고 꿈꾸게 만드는 모습들도 있었다. 공감과 부러움과 고마움, 이 모든 게 합쳐진 연대감을 느꼈다.
17살의 나에게 "난 영화감독이 될 거야"라는 말을 해준 친구가 있었다. 난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친구의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여자가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그때는 페미니즘도 몰랐고, 인지하지 못하는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하며 살아가던 때였다. 여성 영화감독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17살이 된 나에게 친구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선언을 했을 때, 내 마음속에 어떤 벽이 와르르 무너져서 갈 수 있는 땅이 넓어졌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내가 가족들에게 영화를 만들겠다고 처음 말했다. 굉장히 용기 내어 말했는데, 돌아온 반응은 "네가 무슨 영화를 만들어?" 하는 콧방귀였다. 아마 가족들도 키 160센티의 20대 여성이 영화를 만들면서 살아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부업이든 본업이든 영상을 만들어온 지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연출작은 아니어도 영화도 만들었고, 지금도 만드는 중이다. 기획, 구성, 촬영, 조연출, 미술, 편집, 프로듀서, 발행과 홍보... 다양한 직무로 여러 매체의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내 주위에는 수많은 여성 영상인이 있다. 지난주에는 함께 촬영도 하고, 퇴사 후 평일에는 주로 촬영본 스크립트를 정리하고, 어제오늘은 내내 잠을 줄여가며 친구와 함께 영상을 편집했다. 이 모든 것을 여성과 비남성인 친구들과 함께했다. 그리고 오늘 오후 틈을 내서 여성영상인 사진전에 다녀온 거다. 프프프에는 수많은 멋진 여성 영상인이 있고, 이들의 존재만으로 나는 든든함과 뿌듯함을 느낀다.
기울어진 세상에 멀미가 나는 날엔 여성 영상인들의 사진을 보자. 여성 감독의 영화를 보고, 여성 작가의 책을 읽고, 여성들과 함께 작당과 도전을 하자. 계속해서 우리 앞에 생기고 또 생기는 벽을 부수며, 천천히 자신의 땅을 넓혀가는 이들의 눈동자를 보자. 숨이 막히고 속이 뒤집어지는 날에도, 이 연대감이 나를 살게 할 것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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