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새 페미의 섹슈얼리티 탐구 칼럼 #8
사회생활을 할 때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밝힐 수 있는 여성은 얼마나 될까? 실수로라도 집게손가락 모양을 하면 ‘남성을 조롱하는 메갈리아의 후손(?)이다'라는 오명을 써서 직무 정지를 당하고 살해 위협을 받으며, ‘오조오억'이라는 유행어를 모르고 썼다가는 ‘페미 성향이 강한 여초 커뮤니티 활동을 하냐'라는 비난에 해명을 해야 하는 세상이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서도 페미니스트는 ‘극단적인 사람들'이라 생각하면서, 거르는 게 낫다는 의견을 나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페미나치(나치즘처럼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라며 조롱하는 단어)'라던가 ‘뷔페미니즘(페미니즘은 뷔페처럼 선택적으로 권리를 골라서 주장한다는 조롱)' 등 여러 혐오 단어를 만들어왔던 것과 무관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데이팅 앱에 ‘페미니스트'라고 써두는 여성은 얼마나 될까? 우선 프로필 이미지가 가장 잘 보이는 서비스 특성상 그 여성의 외모부터 평가의 대상이 될 테다. 사회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여성의 모습에 가까울수록 ‘예쁜데 왜 페미하냐'는 소리를 듣고, 그 기준과 멀어질수록 ‘페미 관상'이라던가 ‘쿵쾅쿵쾅(뚱뚱하다는 조롱)'과 같은 원색적인 조롱을 받는다. ‘남성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못 생겨서, 열등감이 심해서' 페미니스트가 된 것이 아니냐는 비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다음에 남성과 데이트를 하거나 연애를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도전적인 과제다. 남성과 안전하게 섹슈얼한 또는 로맨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상상하고 시도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문제일 수 있다. 그래도 희망을 품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 싶은 남미새들은 여기까지 어떻게든 해낸다. 그렇다면 (정치적 성향을 알지 못 하는) 상대 남성에게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드러낼지 말지, 드러낸다면 언제 어떻게 드러낼지, 얼마큼 드러낼지도 결정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성애 연애시장에서 ‘페미’라는 점이 그렇게 가산 요인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매력적인 여성으로 셀링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스트임을 언제 어떻게 드러낼지 일종의 ‘전략’이 필요하다.
나 역시 데이팅 앱에서 처음 프로필을 작성할 때 고민에 빠졌다. 페미니스트임을 밝히지 않고 데이트를 하자니 너무 말이 안 통할 것 같고, 그렇다고 소개글에 바로 밝히자니 두려웠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혐오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불특정 다수의 남성들이 있는 어플에 감히 페미 선언을 하자니,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하게 되었다. 누군가 내 사진과 함께 ‘비건 페미’라고 써진 나의 틴더 프로필을 캡처해 남초 커뮤니티에 올리면서 비웃는 일 같은, 일어날 확률이 정말 적지만 절대 0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그런 일들. 실제로 '페미 틴더'라고 검색하면, 남초 커뮤니티에서 '틴더에서 페미 봤다'는 글이 결과로 뜬다. 고민 끝에 나보다 먼저 이 신문물을 접했던 주위 페미니스트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너 틴더 프로필에 페미라고 썼어?” 친구들마다 이 앱을 사용하는 목적과 전략이 모두 달랐지만, 공통적인 의견 중 하나는 어플 사용자의 성비가 아주 불균형하기 때문에 수많은 다양한 남성 중 괜찮은 이들을 빠르게 거르기 위해서는 솔직하고 구체적인 프로필이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용기 내어 소개글 첫 줄에 ‘비건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썼다. 그럼 이제 ‘비건'이나 ‘페미'를 싫어하는 남성은 나름대로 걸러졌겠지? 생각했으나, 그것 역시 완전히 오산이었다. 우선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않고 사진만 보고 스와이프 하는 경우가 많아, 내가 페미라는 걸 잊어버린 채 대화하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오히려 그 단어를 보고 내게 딴지를 걸기 위해 스와이프를 한 경우도 일부 있어서, 피곤한 대화를 해야 했다.
‘진짜 여성이 아직도 차별받는다고 생각하세요?’ ‘여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대에 로스쿨이 있는 게 역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무고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혹시 그럼 낙태죄 폐지에도 찬성하세요? 태아는 생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전남자친구랑 사귈 때도 페미니스트였어요?’ ‘혹시 시위도 나가고 그러세요?’
놀랍게도 이 모든 질문이 무슨 사상검증 인터뷰가 아니라, 데이트 전에 나누는 대화나 데이트에서 듣고 답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페미니스트인 것을 밝힌 채로 이성애 연애시장에 나와있는 여성은 정말 다양한 질문을 감당해야 하는구나, 깨달았다. 게다가 비건 페미니스트라면 이제 비건에 대한 질문까지 받으니, 더 다채로운 편견과 놀라운 무례함을 경험해 볼 수 있다.
그럼 이런 질문을 받는 게 피곤하니, 페미인 것을 숨긴 채로 만나는 것은 어떨까? 우선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호감도를 확인한 다음에,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였을 때 페미임을 밝히는 편이 합리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페미니스트 누구’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데이트를 시작할 수 있는 데다가, 만약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중에는 상대가 페미인 것을 알게 된다고 해도 여러 특징 중 하나로 보일 테니 오해와 편견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
사실 말은 쉬운데, 대체 얼마큼의 호감도를 확인해야 페미니스트임을 알려도 괜찮을지 알아차리는 게 쉬울 리 없다. 잘 되어가는 좋은 분위기에서 페미라고 밝혔는데 상대가 눈에 띄게 호의적인 시선을 거두는 어색한 상황은 누구라도 피하고 싶을 테다. 말을 안 한 것뿐이지만, 일부러 페미가 아닌 것처럼 상대를 속인 듯한 찜찜함도 감당해야 한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니 페미니스트인 게 무슨 큰 흠결도 아니고 그냥 성평등을 지지하는 것뿐인데, 무슨 볼드모트라도 된 것 마냥 꽁꽁 숨겨야 하는 게 답답한 마음도 들 거다.
그 불안과 답답함이 싫어서, 아예 만나기 전부터 페미니스트임을 밝히는 방법도 있다. 페미니스트여도 괜찮다거나 오히려 페미니스트라서 더 좋다는 남성만 만나는 거다. ‘언제 페미임을 밝혀야 하나' 하는 고민 없이 솔직하고 편하게 가까워질 수 있다니, 꿈처럼 느껴지는 기회다. 근데 그 꿈이 꼭 달콤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서로 대화가 잘 통한다고 해서 섹슈얼한 호감을 느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나와 가치관이 비슷해야 끌릴 것 같지만, 현실에서 내가 성적 매력을 느끼는 남성은 대체로 나와 가치관이 달랐다. 아무리 모든 포유류는 DNA의 다양성을 위해 자신과 반대인 개체에게 끌린다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싶을 때가 있다.
문제적일 수 있는 발언임을 알지만, 데이팅 앱을 하면서 느낀 솔직한 심정을 고백해본다.
아니 대체 왜 꼭 생각이 빻고 폭력적인 (언피씨한) 우파 남성이 더 섹시하게 느껴지고,
나와 의견이 비슷한 (피씨한) 좌파 남성은 별로 섹시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죄송합니다...)
지나친 일반화와 이분법에 유의해야 하지만 정말 주관적인 경험에 의하면, 가부장적인 남성은 '남성적인' 운동을 좋아하여 키도 크고 힘도 세며, 자신이 가진 자원을 극대화하는 데 관심이 많고 잘 놀아서 재미있는데, 그게 섹슈얼한 매력과 연결될 때가 많다. 반대로 권리 감수성이 뛰어난 페미니스트 남성은 우선 개체 수가 아주 적은 데다가, 신체 운동보다 사회 운동에 관심이 많고, 대화는 흥미롭지만 노는 건 재미가 없어서, 결국 섹슈얼한 끌림으로 연결되지 않을 때가 많다. 결국 데이트 상대가 아니라 그냥 동료가 되어버리고 마는 거다. (솔직히 남미새 페미 입장에서는 이 두 가지 남성 유형이 적절히 섞였으면 좋겠는데, 그런 하이브리드형 남성은 너무 인기가 많은 나머지 이미 연애 중이거나 내 동료의 전애인이라는 이슈가 있다.)
그럼 페미니스트임을 성공적으로 밝히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과 섹슈얼한 끌림도 잃지 않고 데이트를 하다가 사귀기로 하면, 과연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걸까?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때부터 시작이다. 페미니스트로 연애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다음 글에서 이어 풀어보겠다.
‘남미새 페미’ 8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