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백년 후 아무도 없다> - 이남철 감독
영화는 핵전쟁 이후의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다. 핵폭풍이 휩쓸고 간 반도는 불모의 땅이 되었다.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극소수의 이들만이 살아남아 투쟁과도 같은 인생을 이어나갈 뿐이다. 그 극소수 중 어느 한 무리가 있다. 이 무리는 두명의 중년 남성과 두명의 총각으로 구성돼있다. 중년 남성 두명은 각각 검사와 운전기사였고 검사 출신이 무리의 리더 역할을, 운전기사 출신이 부하 역할을 맡고 있다. 청년들은 이 검사 출신 아저씨를 마뜩잖아 한다.
이들은 북쪽에 생존자들이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눈길을 걸어간다. 그러던 중 이들은 어느 여성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집까지 찾는다. 그녀에겐 남편까지 있었고, 임신을 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는 대부분의 일을 망각하고 있지만, 흐릿한 관념 속에서 몇몇 선명한 인상을 끄집어낸다. 그것은 하얀 안개꽃, 바다, 따뜻한 모래, 엄마. 그것은 되찾을 수 없기에 슬픈 노스텔지어다. 여자를 포함한 생존자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핵구름이 드리운 잿빛 현실 뿐이다.
조우의 기쁨도 잠시, 여자의 남편이 이북 출신이라는 걸 알아차린 리더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한다. 냉전-분단의 논리는 꽤나 강고하게 지속된다. 심지어 멸망 후에도 말이다. 한바탕 소란이 가시고 무리는 부부 곁을 떠날 준비를 한다. 그때 무리의 일행들은 부부더러 함께 가자고도 하고, 리더는 여자가 자손을 퍼뜨림으로써 인류의 미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내의 대답은 이렇다. “우릴 내버려둬. 우린 여기서 살 거야”. 부부는 인류의 생존이라는 거창한 사명 대신 개인의 소박한 행복을 택한다.
한편 무리에선 내분이 일어나고, 두 젊은 일행을 필두로 마침내 지도자의 심복이었던 전직 운전기사 출신 남성마저 리더 곁을 떠난다. 이들은 부부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거기서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리더는 북쪽으로 가고자 하는 꿈을 버리지 못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굴레에서 이탈한다. 그러고는 그냥 남은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도피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현실에 충실한 태도다.
‘중년-남성-검사’라는 아포칼립스 이전 세계의 주류 정체성을 가진, 리더는 북진과 번영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일행들을 다소 권위주의적으로 이끈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반공과 조국근대화를 대중 동원의 이데올로기로 내걸었던 보수세력에 대한 은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보세력도 결은 다르지만 어떤 목적을 위해 ‘작은 것들’을 경시한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무리의 일행과 부부는 어떤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연료가 되기를 거부한다. 이 지점에서 모더니티는 힘을 잃는다. 작품은 목적의식의 상실을 통해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스크린에서 읊은 셈이다.
인디매거진 숏버스 객원필진 3기 최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