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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나의 일기는

안녕, 어린 나.

by 마음돌봄
'일기' 란 인간이 가족과 친구에 대해서 아주 악랄한 글을 써놓고 제발 그들이 보지 말아 주십사 신에게 비는 것이었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 2>

엘리자베스와 매드의 가족인 개 '여섯 시 삼십 분'은 이렇게 깨달음을 얻고 아는 단어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된다. 648개의 단어를 개가 방금 된 것이다.


지금 내 곁에 '여섯 시 삼십 분'이 있다면 다른 말을 해주고 싶다.

아, 물론 인정한다. 그가 말한 것도 일기의 일부분일 가능성이 다소 짙다.

일기라 모든 것을 말해도 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학교를 다닐 땐 일기장을 선생님이 꼭 검사하셨다.

학교에 가져가는 필수 숙제였고, 방학 숙제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림일기를 좀 밀린 적은 있지만 다행히 일기를 성실하게 쓰는 학생이었던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모아놓은 일기장이 제법 된다. 중학생이 되면서는 일기장이라는 이름보다는 '다이어리'라는 이름을 썼는데, 친구들과 우정 일기를 쓴 것도 그즈음이다. 지금 보니 너무나 훌륭한 사교 생활이 아니던가. 친구와 우정을 지키고 나도 모르게 글쓰기 실력이 팍팍 늘어나는 일거양득, 일석이조, 가재 잡고 도랑 치는 지극히 이타적이면서도 개인주의적인 행위이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다이어리와 함께 시작된 편지 쓰기, 친한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나와는 정반대로 하얗고, 야리야리하며 공부를 잘했던 친구는 이름도 예뻤는데(개인 정보 누설이라 이름을 밝힐 수 없음이 원통할 정도다) 둘 다 고전 영화를 좋아해서 늘 편지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드레스를 입은 스칼렛의 모습을 하고 있거나 레트 버틀러 역할의 '클라크 케이블'이 특유의 진한 눈썹을 한쪽만 올리며 짓궂게 웃는 모습이 프린팅 되어 있었다. 공부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남자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대학 때 잠깐 만나고는 인연이 끊어지게 되었는데, 일기라는 주제로 글을 쓰다 보니 그 친구가 참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때 일기를 들춰보니 1990년이 끝나감을 아쉬워하는 아이의 글이 있다.


<제목 : 1990년>

'이제 오늘이면 90년도는 지나간다. 곧, 아니 내일이 1991년도다. 정말 슬프다. 3학년 10반 67번(헉, 67번이라니)이 아닌 4학년이 된다. 정말 좋았는데 이제 4학년이 되어버리다니. 아고 아고 어야디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야디야.'

이건 진정한 일기였을까. 시간 때우기용 긁적임이었을까.


<제목 : 케빈은 12살>

'7시 10분 케빈은 12살을 보지 못했다. 정말 기분이 나빴다. 케빈은 12살, 정말 재미있는데.

케빈, 아널드, 위니, 폴이 나온다. 유모어가 있다. 그래서 애들부터 어른들까지 본다. 재밌고 웃겨서.


나도 참 이 일기가 웃기고 웃기다.

'미드'라는 말도 없던 시절 화요일인가 목요일인가 기억도 안 나지만 <케빈은 12살>이란 청소년 드라마를 방영했고, 주말에 보는 <소머즈>나 <600백만 달러의 사나이>만큼이나 재미있게 보던 기억이 있다. 이후 <천재소년 두기>나 <미녀와 야수>를 봤는데 그게 미드를 처음 만난 거였다니.






중학교 때 다이어리는 찾을 길이 없고, 상자 속엔 고등학교 때 다이어리가 보인다. 친구랑 주고받던 편지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나오지 않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편지지. 흑백으로 있어서 정말 좋았는데 요즘은 찾을 길이 요원하다. 손 편지조차 잘 쓰지 않는 시대가 되어 버렸으니. 그래서 더욱더 <편지 가게 글월>이란 책이 마음에 와닿았는지도 모른다. 서울에 두 군데나 있다고 하니 내겐 필수 코스가 되어버렸다. 연희동에 가봐야겠다.


여고생의 다이어리는 약간의 자기혐오와 미래에 대한 불안, 부모에 대한 불신과 소망과 꿈으로 가득 차서 아이러니하다. 간간히 당시 유행하던 아이돌의 스티커가 붙어 있고, 좋아했던 배우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금성무의 사진이 있다, 신문에서 오린 채로. <안네의 일기>처럼 내 일기를 책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들어 있고, 브론테 자매는 16세에 소설을 써서 호평을 받았는데, 17세인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며 일기나 쓰고 있는 것이냐 한탄하는 문구도 보인다.

잠시 학교에 근무하셨던 문학 선생님은 우리들 사이에서 '리틀 이영애'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배우 이영애와 닮았고 청소하셨는데, 문학이라는 장르와도 너무 잘 어울렸다. '자신이 어떤 위치, 어떤 자리에 있던지 확고한 자기중심만 있다면 그 어떤 것에서든 교훈을 얻을 수 있다'라며 선생님이 말하던 모습을 내 일기에 쓰인 이 문구를 보며 떠올렸다. 하얀 붓꽃처럼 생기신 선생님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여리지만은 않았다. 문학이 어울리는 내면이 강한 분이었다. 난 그분과 나의 생각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미션 스쿨을 다녔던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학교 예배당에 가서 찬양을 하고 설교 말씀을 들었으며 성경을 공부했다. 이 부분은 종교와 상관없다고 감히 말한다. 내가 불교 신자였어도 이 시간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며 집안 대대로 뿌리 깊은 이슬람교, 도교, 불교, 힌두교였어도 거부하지 않았으리라. 많은 세상을 알고 싶고 떠나고 싶었던 소녀에게 종교 수업은 하나의 학문이었을 뿐. 어쩌면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던 할머니 덕분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며 노력이라 믿고 좌절하지 마세요."

이 말씀을 해준 건 교목이셨던 목사님이다. 다시 일기를 읽어보니 치열한 자기 갈등과 검열의 시간을 보냈던 소녀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자기 연민에 늘 괴로웠는데 이런 말들로 위안을 삼고 일기장에 꾹꾹 눌러 담았다. 지금도 충분히 통하는 말이 아니던가.


한국 영화의 부흥기였던 때라 업그레이드된 한국 영화를 보며 느꼈던 소회들도 줄줄이 적혀있다. 영화 '쉬리'를 극장에서 보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관객들과 함께 박수를 쳤던 기억, 하나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가 영화 후반부에 약해졌다고 느낀 점까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존 그리샴과 경요의 <금잔화>를 읽고, 지금은 구하기도 힘든 <You've got mail.>의 엽서까지 붙여있는 일기장. '여섯 시 삼십 분'에게 말해주고 싶다.

일기는 그래. 추억과 기억이 묻어있는 곳이라고. 그때 그랬지 하고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는 타임머신이라고. 아마 너도 글을 쓸 줄 안다면 누구보다 잘 썼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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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와 친구의 손편지>



지난 일기들을 읽으며 나에 대해 더 들여다본다. 어떤 문장에선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고 어떤 부분에서 계속 그렇게 하면 된다고 외치고 싶다.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도 말하고 싶다. 이제 보니 참 다행이다. 일기를 써서. 손으로 열심히 움직이고 생각해서. 어제 일도 생각 안 나는 인지 부조화의 시대에 다시 나를 들여다보고 과거를 알 수 있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아, 물론 '여섯 시 삼십 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실 방금 펼쳐진 일기장 첫 페이지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 섞인 글이 있었으므로,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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