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무리한 일정이었다 싶으면 여지없이 눈에 다래끼가 난다. 이번엔 왼쪽 눈이다. 지난밤 왼쪽 눈이 조금 뻑뻑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역시나 눈 아래 부분이 살짝 부어있었다. 이물감이 느껴져 불편했다. 하지만 주말이라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기도 어려운 상황. 악화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시력이 좋아서 안과에 갈 일이 별로 없는 편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다래끼 때문에 일 년에도 몇 차례 씩 안과를 방문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눈이 불편하면 바로 안과로 간다. 다래끼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는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을 정도로 아주 약한 통증에도 자주 병원을 찾았다.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아야 안심이 됐다.
십여 년 전, 대학교 졸업과 취업을 준비하며 연애까지 하느라 잠을 줄여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역시나 눈다래끼가 났다. 그땐 다래끼보다 급한 일이 너무나 많았다. 자기소개서도 써야 하고 토익 점수를 10점이라도 더 올려야 했고 데이트도 해야 했다.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에 병원에 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다래끼의 염증이 가라앉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끔찍한 상황으로 바뀌어버렸다. 주말을 지내는 사이 오른쪽 눈꺼풀 위로 빨간 살덩이가 생겨버렸다. 나 역시 내 얼굴을 제대로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징그러운 살덩이였다.
다래끼를 며칠 묵힌 결과는 처참했다. 나는 수술대 위에 누워야 했고, 2차 감염으로 자라 버린 살덩이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항생제를 복용하고 병원에 가서 매번 소독을 받고 안대를 끼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다.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살덩이를 잘라낸 자리는 원래의 눈 모양을 보전하지 못했다. 부자연스럽게 아물어버린 내 눈의 모양을 커버하기 위해 한동안 아이라인을 신경 써서 그리고 다녀야 했다.
그 후로 나는 눈의 상태에 아주 민감해졌다. 자주 눈을 돌보고 아낀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면 온찜질을 해주고 눈에 휴식을 준다. 그렇게 달래 가며 눈과 살아간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나는 무던한 아이였다고 한다. 지금도 엄마는 내가 사춘기를 겪지 않은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당사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엄마로서는 딸의 사춘기를 특별히 느끼지 못하셨다고 말이다. 나 스스로도 내 사춘기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엄마 모르게 독서실을 간다고 나서서는 노래방을 갔던 고등학생 시절이 내 사춘기였을까. 남자친구를 사귀고 헤어지며 이성에 눈을 뜬 중학교 3학년 때였을까. 엄마 몰래 눈썹을 그리고 다니다가 귀갓길 엘리베이터에서 눈썹 지우는 일을 잊어버려 엄마에게 발각되고 등짝을 맞은 때, 대체 왜 부모가 되어 자식을 때리는 건지 난생처음 화가 났던 그때가 사춘기였을까. 그러고 보니 무던한 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엄마 몰래 참 많은 일을 했다.
20대에도 30대에도, 대학생에서 사회인으로 그리고 전업주부로 내 사회적 역할이 바뀌고 딸에서 아내 며느리 엄마의 역할까지 주어지는 변화 속에서도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주어진 대로, 해야 하는 일을 하며, 남들 사는 대로 살았다. 내가 느끼는 감정보다는 타인의 감정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서운한 감정, 억울한 감정, 슬픈 감정, 화가 나는 감정을 느꼈음에도 덮어둔 채로 살았던 시간이 참 길었다. 타고난 내 성격인 탓도 있고 자라며 억압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곪아버린 다래끼처럼 3년 전부터 내 마음 안에서 고름이 터져 나왔다. 살피지 못한 마음은 다래끼의 고름처럼 통증으로 차올랐다. 묵힌 감정들이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썩어 문드러진 마음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쓴 채로 살아가는 내 삶에 썩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묵혀서 아무는 감정이 있는가 하면 묵힐수록 썩어버리는 감정도 있다. 묵혀서 탈 난 다래끼처럼 감정도 묵혀서 크게 탈이 난 것 같다. 다래끼처럼 내 마음도 달래 가며 살았어야 했나 보다.
가면 속의 내가 진짜 나인지, 나조차도 헷갈려 연기하듯 살아가던 날들이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만난 글쓰기로 내 안의 감정과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자주 생겼다. 고름을 짜낼 때 통증을 느끼듯, 감정을 꺼낼 때마다 힘들고 아프다. 내 안의 감정을 대면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매번 주춤한다. 어렵게 꺼낸 것들이 거의 부정적인 감정들이라 나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한다. 그 당황과 아픔이 싫어 다시 외면하고 싶어 진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라도 꺼내어져 마주한 무겁기만 했던 감정은 휘발되어 날아가 버리고 한결 가벼워졌다는 사실이다.
열 살에 사춘기라기엔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요즘 눈빛이 달라진 딸 소민이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든다. 사랑만 가득하던 아이의 눈빛에서 나를 향한 다른 감정이 자주 느껴진다.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아이는 우리 부부의 일정 때문에 친구와 놀지 못하게 되었을 때 특히 눈빛이 변한다. 원망의 눈빛이다. 심지어 주말에 외갓집에 가는 것조차 가기 싫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릴 적엔 한 달에 한두 번 주말 저녁 꼬박꼬박 부모님을 따라 외갓집에 갔었는데. 그날의 나를 생각하며 내 딸도 나처럼 군말 없이 따라가 주기를 바라지만 내 딸은 나와는 다르다. 소민이에게 직접 외갓집에 가기 싫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말문이 막혔다.
싫다는 말을 엄마 아빠에게 할 줄도 모르고 하지도 못했던 순종적인 나처럼 소민이가 그렇게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나처럼 순종적이지 않은 아이를 바라보며 대체 이 아이는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이렇게 키워도 되는 건지 누군가에게 되묻고 싶은 양가감정이 혼란스럽다. 부정적인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소민이를 보며, 감정처리에 서투른 나는 당황하고 만다. 나는 대체 소민이를 어떤 아이로 키우고 싶은 걸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쳐지는 눈꺼풀로 인해, 내 인생에 평생 없을 거라 생각했던 쌍꺼풀이 생겼다. 쌍꺼풀 덕분에 나만 아는 다래끼의 흉터는 더 이상 내 눈에 띄지 않는다. 마음의 흉터도 시간이 지나면 눈에 띄지 않게 될까.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다룰 줄 아는 아이로 키운다면, 나와는 다른, 묵힌 감정에 힘들어하지 않고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