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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Sep 03. 2023

내 인생의 황금기?!

놀아본 여자


며칠 전,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네 인생에서 가장 재밌게 놀았던 때가 언제야?"

 "나? 20대 초반 같은데?"

 "그렇지? 너나 나나. 크크큭.

 있잖아. 후배들한테 물어보니까 다들 결혼 전, 그러니까 취업하고 나서 결혼하기 전까지의 시간이 대부분 제일 재밌게 놀던 시기라잖아. 우리는 못 놀아본 거지."



 정말 나는 못 놀아봤나?

대학생 시절, 과외 아르바이트로 대학생 치고 부족하지 않게 용돈을 쓸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의 지원으로 대학교 학비의 부담도 없었다. 교회에 내 발로 걸어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약 4년 동안 원 없이 놀았다고 생각한다. 놀만큼 놀았기에 세상의 갖가지 유흥에 미련이 없었고, 성경을 알기도 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를 이해했을 만큼 후회 없이 놀았으니까 말이다.



 20살, 여대생이었던 나는 학교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초, 중, 고등학교 12년 동안 남녀공학을 다닌 탓에 여자들만의 사회가 너무나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여대생으로서의 대학생활은 개미 눈곱만큼도 재미없었다.(친구들아 미안해) 짧은 치마에 화장 곱게 하면 뭐 해. 여자들 뿐인걸. 여자들끼리만 이러쿵저러쿵 수다 떨면서 몇 시간씩 붙어 다니는 것도 나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 대학 공부에 열심인 친구들을 뒤로하고 열심히 놀러 다녔다. 교내 동아리가 아닌, 연합동아리에 가입하여 수많은 대학교의 친구들, 선후배들과 교제했다. 다양한 레저 스포츠를 즐겼고, 정기 모임이든 번개 모임이든 대학교 강의에는 결석해도(교수님 죄송합니다) 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놀러 다녔다. 연합동아리의 큰 둘레 안에서, 대학생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놀거리는 다 접해봤다고 생각한다.



 연합동아리의 활동은 생각보다 광범위해서, 그 안에서 수많은 레저스포츠를 경험할 수 있었다. 볼링은 기본이고, 여름이면 수상스키와 래프팅, 겨울이면 스노보드, 봄가을엔 번지점프, 산악 ATV를 하는 등 말이다. 일 년에 한 번은 일일호프를 열어서 학교 친구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볼링대회를 앞두고 선수처럼 모여서 훈련을 하기도 하고, 과장 조금 보태서 거의 매달 산으로 바다로 함께 놀러 다녔다.

   


 동아리 내 댄스소모임에서도 활동했는데, 전문 댄서에게 춤을 배워서 전체 동아리 엠티에 가서 수백 명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춤 좀 추는 언니들 덕분에 춤에 눈을 뜬 나는 소모임 언니들과 클럽을 열심히 다녔다. 은근히 유교걸인 나에게는 '남자를 만나러 가는 곳은 나이트, 춤을 추러 가는 곳은 클럽'이라는 나름의 소신이 있어서 열심히 클럽에만 다녔다. 클럽에서도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클럽을 다니면서 알았다. 어쨌든 나는 내 소신대로 했다. 클럽에는 춤을 추러 다녔다.



 야구장 다니는 오빠들을 따라다니며 두산베어스의 열렬한 팬이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야구장에서 응원하면서 곁들이는 생맥주 한 잔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날리며 야구장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나중에는 급기야 경기 전 선수들이 몸 푸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리오스 컨디션 좋다.', '김동주 오늘은 홈런 나오겠는데?' 하는 정도의 평을 하며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선수들 응원가 정도는 당연 척하면 척이었다. 끝까지 가봐야 아는 야구의 매력에도 푹 빠졌지만, 야구 시즌의 서늘한 밤공기와 평일 야구장의 한산하면서도 후끈해지는 반전의 분위기가 좋았다. 야구장 입장료도 그 당시에는 저렴한 편이어서 딱히 놀만한 일정이 없으면 야구장에 갔다.



 동아리 스키캠프를 통해 스노보드를 배웠다. 함께 배웠던 동아리 친구가 스노보드 동호회에 가입하지 않겠냐고 해서 가입했다. 주말마다 스키장에 가서 1박 2일 동안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계속 스노보드를 탔다. 마침 연합동아리에서도 스노보드 소모임을 운영한다고 해서 활동하던 동호회와 연합하여 시즌방을 계약했다. 덕분에 두 시즌의 겨울 동안 스키장에서 살았다. 일주일에 2박 3일은 스키장에 있었다. 지금도 엄마는 가끔 이야기하신다. 대학생 때, 딸 얼굴을 거의 못 보고 살았다고.



 스노보드를 함께 배웠던 그 친구와, 유럽여행을 계획했다. 둘 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며 여행경비를 모았다. 여대생 둘을 유럽에 보낼 수 없었던 부모님은, 막 대학교 새내기가 된 남동생을 여행메이트로 붙여주셨다. 완강히 거부했지만 함께 가지 않으면 유럽여행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부모님의 단호한 협박에 어쩔 수 없이 같이 갔다. 가서 따로 다니면 되었으니까. 같은 날 여행을 떠나고 같은 날 돌아오기는 했으나, 여행 일정은 각자 세워 따로 다녔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신 부모님은 뒷목을 잡으셨다.



 놀기만 한 것도 아닌 것이, 꾸준히 동아리 선후배들과 봉사활동을 했다. 지체장애, 지적장애를 가진 청소년들이 생활하는 기관에 방문하여 목욕과 식사 등을 주기적으로 돕기도 했고, 장애인들에게 직업 교육을 하는 기관을 찾아가 함께 교육했다. 봉사를 하는 시간을 통해 내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듯 연합 동아리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에는 전부 다 참여했다. 대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많은 문화생활도 틈틈이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충분히 놀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가끔 만나는 대학교 친구들은 '우리도 spring처럼 놀았어야 해.'라고 말한다. 그때 양껏 못 놀아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도 계속 놀고 싶다는 마음이 늘 있다고 말이다. 정말이지 나는 그때 다 놀아서인지 더 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질문에 같은 답을 한 남편은 정작 나와는 전혀 다른 대학생활을 보내서, 아쉬울 것 같기는 하다. 대학생 때는 공부하느라 못 놀았고, 친구들 중 제일 먼저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나와 남편은 20대 초반이 가장 열심히 놀았던 때라고 똑같은 답을 했으나, 그 놀이의 깊이는 사실 '어나더레벨'이다. 남편은 우리가 같은 답을 한 것에 동병상련을 느끼며 자기 위안을 한 것 같던데, 사실을 제대로 알고 나서는 조금 억울한 감정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내가 이렇게나 열심히 놀았다는 것을 알면 배가 아플라나.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남편이 좀 놀아보겠다고 한다면 흔쾌히 허락해 줄 마음 넓은 아내가 아님에 유감일 뿐이다.(놀아봤기에 마음껏 놀라고 할 수 없다) 



 남편의 질문 덕분에 내가 얼마나 잘 놀았는지 다시금 추억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학생 신분이 아닌 사회인으로서 논다는 것이 내가 후회 없이 놀았던 그 시절의 즐거움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저와 다른 즐거움이 있으셨던 작가님들, 경험 나누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황금기였나 싶은 20대 초반이 제일 즐겁게 놀았던 시절이긴 하지만 되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No"를 외치겠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놀지는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대학교 전공 공부에도 좀 더 신경 쓰고, 진로 탐색과 취업 준비에도 더욱 노력을 쏟았을 거다. 노느라 놓쳤던 구멍이 분명히 존재함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는 분명하다. 그때 원 없이 놀았기에 세상 것 헛되다를 외치며 신앙을 갖게 된 것이니까 말이다. 교회에서 남편을 만나게 된 거니까. 남편과 결혼했기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내 딸이 태어났고.



 그러므로 남편이 지금이라도 놀 생각을 하지 고 지금 이 순간을 그냥 즐겼으면 좋겠다. 앞으로 나랑 열심히 놀면 되니까 말이다. 그렇게 놀아놓고도 남편이랑 또 놀 생각 하니 행복한 나는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는 속담처럼 잘 놀아봤기에 진정 놀 줄 아는 여자인가 보다.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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