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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Jan 09. 2023

그 애는 늘 어떠한 형태의 유별을 달고 살았다.

스물네 번째 공백

유독 잠이 오지 않는 밤이라거나, 오랜만에 가진 휴일의 자유시간에는 종종 생각나는 이가 있다. 나는 그 애였고, 그 애도 나였다. 좋아하는 뉴에이지를 틀고 눈을 감으면, 그 애의 생존에 대한 생각이 나른한 손 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간다.


생존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 애의 삶은 살아가기보다 살아내는 것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따금 그 애의 생존을 생각했다. 실은 그 애의 마음속에 아주 오래 곪은 죽음이 뿌리를 내렸다 하더라도, -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끝끝내 살아남기를 바랐다. 어쩐지 유약한 그 애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관조하듯 볼 수 있다면, 내 삶에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되어줄 것 같았다. 그러니 그 애의 생존은 나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지켜보고 싶었다. 평범하고 흔한 그 애의 일상들을.

친구들과 가끔 생각날 때 만나 술을 마시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속에 묵은 것들을 조금 털어내고, 재미도 없는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다가 역시나 재미없었다며 욕을 하는 대신 평소에 잘 먹지 않던 팝콘을 전부 먹어치우는 하루를 보내는 정도면 족했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야말로 살아있음의 가장 흔한 증거였으니까. 유별날 필요도 없었다. 그 애에게는 그 자신 이상의 留別을, 아니 有別을 쥐어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물론 내 뜻대로 될 일은 절대 아니었다. 그 애는 늘 어떠한 형태의 유별을 달고 살았다.


그 애의 주변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이해해줄 수는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애를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 애 하나뿐일 것이다. 모두가 그 애와 같은 삶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설령 똑같은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명백히 타인의 삶일 뿐, 누구도 그 애의 삶에 간섭하며 감히 '완벽한 이해자'를 자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완전한 단절이 그 애를 계속 지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나라도 위선적인 이해자가 되어주었다면  애가  힘들었을까?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절대 되어줄  없는 역할이었음은 분명했다. 나는 위선이라는 이름의 오만을 싫어했으니까. 그것이 스스로의 오만이라면 특히.

그리고 그 애는 지쳐있는 주제에, 이해를 노력해보려는 이들에게는 꼭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내 탓이지. 미안해, 나를 알고 지내게 해서.'

그것은 한 치의 위선도 없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근데, 그래서 더 짜증이 난다. 그 애는 언제나, 늘, 자신의 삶 전부가 타인에게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는 게 화가 났다. 그리고 서러웠다. 모르겠다, 그 애가 너무 불쌍했다.


드라마나 영화, 만화나 소설 주인공들은 언제나 아픔을 겪고 그 고난을 이겨내며 성장한다. 주인공의 여정에 기꺼이 함께 해준 주변 인물들과 함께 희망찬 미래를 약속하며 해피엔딩을 맞는다. 그것은 언제나 최고의 결말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 애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무뎌지고 희미해질 수는 있어도, 아주 작은 물 한 방울 떨어트리는 것만으로 언제든 다시 퍼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 애는 매일같이 애를 썼다. 희미한 상태로 말라가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자기도 무력하게만 살고 싶지 않다고, 잘 살아내고 싶다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잘 살아낸다'는 것에 목적은 없었다. 그저 잘 살아내고 싶을 뿐인 것 같았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살고 싶은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벽을 두르는 것 같았다. 자기 자신에게 암시를 거는 것처럼, 흔한 이야기들 속 주인공처럼 시련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매정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 애는 정말 그렇게 살고 싶어 했으니까. 악착같이. 하지만 그 말은 즉, 그 애는 진실로 그런 삶을 살 수 없었다는 것과 같다. 외로움, 슬픔, 우울함, 그리움, 서러움, 그런 것들이 그 애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그 애는 끈질기게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발버둥만, 계속 쳐댔다.


그래서였다. 그 애는 평생 자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거머리 같은 감정들 때문에, 남들에게 자신의 삶을 드러낼 때마다 항상 움츠러들고 소극적인 태도로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우울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해,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을 이야기만 해서 미안해, 같은 말만 계속해서 미안해, 너희한테 이런 얘기 자꾸 해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 애의 삶은 최소 5할이 짓지도 않은 잘못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아. 답답하다. 속이 쓰려, 짜증 나서. 나는 네게 진심으로 미안하지만, 조금 원망도 들어.


네가 진심으로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랐는데, 분명 나만이 너의 행복한 미래를 바란 것이 아닐 텐데. 우리의 애정은 너의 케케묵은 감정 하나보다도 못한 것들이었는지. 네 사람들 나름대로의 노력이 네게는 정말 한 치의 희망조차 되어주지 못한 건지. …아니, 되어주었겠지. 되어주었지. 그러니, 그 애가 지금까지라도 살아있어 주는 거겠지. 그래, 그렇게라도 나는 너를 살려내고 싶어. 계속 그 애를, 너를, 너를 통한 나를 보고 싶어.


그 애는 나였고, 나는 그 애였다.

그 애의 생존은 곧 나의 생존이었다.

이기적이라 미안해, 그래도 우리 같이 살아보자. 살다 보면 네가 찾지 못했던 살아가는 이유를 붙잡게 될 거야. 정말이야. 그래서, 그게 지금까지 네 삶의 유별 중 가장 큰 별이 될 거야. 타인으로부터가 아닌, 내 자신으로부터 찾은 가장 오랜 이정표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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