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랑한 제너럴리스트의 1년 업무 후기
오랜만에 브런치에 접속했다. 근 1년 만인 듯하다. 1년 전에 올린 글엔 입사하기 직전의 최종 면접의 심경이 적혀있었다. 다시 찬찬히 읽어 봤다.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감각을 묘사한 “무언가 닿자 떨고 있다는 걸 알게된 손으로 문을 닫고 나오면서...“ 그 구절에 소름이 돋았다. 저땐 언어가 살아있었구나. 내심 그때의 내가 부러워졌다.
일 년 조금 넘는 새에 나에겐 무슨 일이 있었나. 있었던 일들을 온전히 체화하기 위해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 같고, 주체할 수 없이 요동치던 멘탈을 잡기 위한 고민으로 수없는 밤을 지새웠고, 주위 사람들 눈치를 치열하게 살피며 이곳에 최적화된 관계성을 쌓기 위해 노력해왔다. 당시엔 한 가지로 괴롭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하기 위한 두 가지 이유를 굳이 찾으려고 했는데, 주변에서는 아직 어린데 퇴사도 방법이지 않겠냐 했지만 오기 때문인지 내 선택이 후회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근데 지금 생각은 다르다. 때론 내 선택이 후회스러울 수 있다.
그런 새로운 생각의 전환이 시작될 때쯤 적응했다. 이때쯤 정리한 문구 몇 가지를 적자면
(1) 선택을 후회해도 된다.
(2) 내가 내 수고를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한다.
(3) 어느 정도 합리적인 남 탓도 필요하다.
(4) 취업이라는 건 내가 가게 될 그 자리(포지션) 및 상황과의 인연이 작용해야 하는 것이다.
(5) 뾰족한 수도 없이 흔들리는 게 제일 바보 같은 일이다.
(6) 여기서 제대로 퍼포먼스를 내거나, 아니면 정신 차리고 떠나던가.
(7) 타고나지 않은 걸 되게 하려는 순간 비극이다.
(8) 대행사에 다니면 내 마음에 드는 것보다 광고주의 마음에 드는 게 더 중요하니 내 선에서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있는 사안인지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9) 조직에 대한 만족도는 회사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10) 선은 넘어봐야 선인 줄 안다. 등등으로•••
아무튼 난 아직 뾰족한 수도 없었고,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 여유도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제대로 퍼포먼스를 내기로 했다. 엉켜있던 머릿속은 어느 순간 깨끗해졌다.
지나온 경험을 정리하면서 내가 받았던 도움들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첫 번째로 가장 감사한 일은 지금의 내 사수를 만난 일이다. 사수와 지금처럼 친해지기 전, 처음으로 단둘이 외근 나가던 차 안에서 나는 맹랑하게도 “저는 인복이 좋아요. 전 그런 인복의 도움을 많이 얻는 편이에요.“ 라고 선수 쳐 말했었다. 그땐 내심 그냥 나한테 잘해달라고 어필했던 말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나에게 가장 복된 인연이 되어주실 줄이야. 내가 그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대화가 잘 통하거나, 업무 스타일이 잘 맞는다거나 그런 것들을 넘어 ‘내가 추구하는 태도를 알아봐 준다는 것’ 때문이다. 서로 정반대 지점에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삐걱거리던 때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이 더 감격스러운 게 아닐까. 리더에게 완벽을 기대하지 않고도 충분히 리스펙 할 수 있다는 경험이 생겼다.
두 번째로 감사한 일은 나의 긴긴 말을 들어주는 동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힘든 일을 주변에 말하면서 푸는 편인데, 위험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난 회사 동기들에게 많이 털어놨다. 너무 고맙게도 동기들은 나의 앞에서나 뒤에서나 나를 나 자신의 평가보다 더 크게 대해줬다. 오히려 지금은 나로 인해 회사를 다닐 가장 큰 동기부여를 얻고 있다고 말해주니 더없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로 감사한 일은 나를 신뢰해 주는 후배와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6개월 차에 첫 부사수를 받아, 도움이 되고픈 마음에 PPT로 부랴부랴 어설픈 첫출근 가이드를 만들었다. 운 좋게 다른 팀에도 배포했고, 거창하게 감사인사까지 나눴지만 직무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첫 부사수를 보내고 나서 나도 많이 위축되었었다. 그리고 만난 두 번째 후배는 나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 큰 프로젝트를 리딩 하기 벅차다고 느낄 때 받았던 메시지. 나에게 이것보다 더 큰 리워드가 있을까. 그리고 그가 이젠 일에 탄력을 받아 긴장감까지 느끼게 한다는 사실이 내겐 몹시 흐뭇하기도 하다.
얼마 전 다른 팀 친한 동료로부터 들었던 피드백이 있다. “인영아, 나는 네가 막 입사했을 땐 네가 가진 게 많이 없어서 그런 것들을 메우기 위해 관계를 이용한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이젠 너에게 PM으로서 프로젝트를 리딩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조직에 적응하니까 그런 관계지향적인 사고가 거둬지고 너 업무 역량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게 아닐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업무 스타일이 관계지향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 같은 제너럴리스트에게는 관계라는 가장 큰 무기가 있다는 게 곧 자신감이고 업무 역량인 것 같다. 내겐 언제든 나와 함께해줄 동료가 있고, 그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있을 때엔 기꺼이 상처받으며 먼저 다가갈 용기가 있다. 그렇게 나와 우리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프로젝트보단 동료들을 케어하는 데에 더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이젠 프로젝트를 잘 성사시키는 방법은 조금은 알 것 같은데, 동료들과 무난히 함께 지내고 서로 으쌰 으쌰 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앞으로는 내가 받았던 거친 케어를 조금 더 부드럽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어깨너머 알음알음 알게 된 새로운 방법들은 이 작은 조직 안에서 적용해 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다 나름 실험한 방법에 긍정적인 리액션이 돌아올 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요즘은 “선보인다”는 것보단 “통한다”는 감각의 재미가 더 크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내가 갖고 싶은 업무 능력은 “다정함”이다. 아, 어쩌면 다시 세상으로부터 회수하고 싶은 능력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겠다. 생태 같은 눈빛으로 상대의 눈을 마주치고, 그들의 노력을 기억하고 다시금 언급해주고, 언급하기 위해 한번 더 관심을 갖고, 언제든 옆에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그 다정함을 베풀고 싶다. 자못 여유가 필요한 일이라 그간 후순위로 미뤄왔던 것 같다. 조금 더 따뜻한 순간을 많이 누리고 주변에 베풀 수 있으면 좋겠다. 다음 글에선 나의 다정함에 대한 후기를 남길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