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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정 Sep 26. 2022

매화 초옥을 찾아가는 길

전기의 매화초옥도, 그림 속 사람이 되고 싶다

고담 전기(田琦). 1825년에 개성에서 태어나 1854년에 요절한 조선의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친구가 그림을 실제로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옛 그림은 도록으로 접하기 쉬운데 실제로 보면 그림 사이즈가 작아서 직접 보았을 때 감흥과 풍취가 덜 하지 않냐는 말이었다. 실제로 전기의 그림들은 공책 크기만큼 작은 그림들이 많다. 전기는 약포를 운영한 중인이었고, 약을 싸고 남은 종이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생활세계와 예술이 분리되지 않았다. 그림의 사이즈가 뭐 그리 중요할까 생각했던 나도 막상 간송이나 호암미술관에서 그림을 완상하면 다른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특히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마상청앵도>, <군선도>나 신윤복의 <미인도>는 그 자체로 압도하였다. 그러나 유리장 속 작은 소품 같은, 심사정과 전기의 그림, 상대적으로 소품인 김홍도의 병진년 화첩 속 그림들은 가슴에 품고 다니고 싶을 만큼 살뜰하고 섬려한 결로 다가왔다.

     

전기의 산수화는 호젓하고 정답고 담백하다. 고요한 가운데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화초옥도가 그렇다. 화폭 속 온통 매화 천지이다. 초옥의 주인을 한 남자가 찾아간다. 주인은 오경석이고, 그를 만나러 가는 사람은 전기 자신으로 보인다. 주인은 산속 초옥의 문을 열어놓고 벗을 기다리며 피리를 불고 있다. 친구는 거문고를 메고 다리를 건넌다. 옷 사품에 설렘이 감돈다. 푸른 옷과 붉은 옷차림이 대비를 이루고, 오른쪽 상단과 왼쪽 하단에 인물을 대칭적으로 배치하여 대비 속에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투명한 설채(設彩)와 특이한 태점(苔點)에 의하여 이루어진 화면은 전통회화의 기법이면서도 청량함과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매화 초옥은 당시 화가들이 자주 그리던 소재였다. 중국 송나라 때 임포는 속세를 벗어나 저장성 항주 서호의 고산에 초옥을 지어놓고 살았다 한다.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고 사슴을 심부름꾼으로 삼아 결혼도 하지 않고.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나 은둔을 꿈꾼 화가들이 매화 초옥을 그리고, 초옥에서 고요히 책을 읽거나 벗을 기다리는 인물에 자신을 투영했던 것이다.      


어제 문득 조희룡에 관한 책을 읽다 그가 저술한 호산외사(壺山外史)중 전기를 다룬 부분이 나와 반가웠다. 조희룡은 전기와 함께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있었고, 19세기 여항인들의 모임이었던 벽오사 동인이었다. 그의 책 호산외사는 당시 신분이 낮았던 중인 계급으로 서화, 점술, 학문에 뛰어난 전기, 김홍도, 임희지, 최북 등을 조명하고 있다. 상세한 인물 묘사뿐 아니라 교유관계도 자세히 다뤄 미술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조희룡은 전기를 묘사하며 “체구가 크고 빼어나며 인품이 그윽하여 진·당(晉唐)의 그림 속에 나오는 인물의 모습과 같다”라고 하였고, “전기의 산수화는 쓸쓸하면서도 조용하고 간결하면서 담백하여 원대(元代)의 회화를 배우지 않고도 원인(元人)의 신묘한 경지에 도달하였고, 그의 시화는 당세에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상하 100년을 두고 논할 만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책을 보다 잠이 들어서인지 밤에는 전기의 꿈도 꾸었다. 백매화가 만개한 초옥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조희룡의 말이 떠올랐다. "고담의 안목과 필력은 조선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하늘이 그에게 생명을  주었더라면 시와 그림의 끝을   없을 "이라는 안타까움은 조희룡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30살이나 어린 고담을 대등한 벗으로 여기며 전기의 천재적 필력과 안목을 흠모하고 사랑했던 조희룡의 마음. 유배지에서 뜻과 취향을 같이 하던 벗을 그리워하며 시를 남겼는데 우의가 진하게 배어난다.   

   

“가장 잊기 어려운 곳 벽오당

흰구름 푸른 산 한 꿈이 길구나

문자로 사귐은 골육보다 더하다는

소동파의 이 말 아직도 빛난다.”     


전기를 생각하며 쓴 편지도 있다.

"지난해 이별은 한 번 이별이 천년에 해당합니다. 고담의 그림을 대하고 기뻐 넘어질 듯한 이 마음을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원하는 바는 그저 고담의 그림 속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나도 고담의 그림 속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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