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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윤 Dec 08. 202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몇 년 만에 모임에 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편하게 어울리는데 혼자 낯가림을 했다. 머쓱해서 식탁 위의 사케를 홀짝홀짝 마셨다. 술기운이 오르니 한결 자리가 편해졌다. 이래저래 마신 술이 꽤 되었고, 그 여파로 며칠 숙취에 시달렸다. 다음날 일이 몰려 종일 바쁘게 뛰어다녔는데 그때마다 속이 얼마나 울렁거리던지. 일터와 집을 맴돌이하는 건 나의 내향적 성격과 그로 인한 좁은 인간관계 때문이라 생각했다. 숙취로 며칠 고생하고 일에 집중력이 떨어지자 문득고독이 나름 생존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남기위해 생존 근육을 키워오듯이 나는 나에게 집중하는시간을 최대한 늘리면서 버텨온 거였다.




그래도 술은 사람을 풀어지게 해서 귀가하는 길 문득 옛 추억에 잠겼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누군가를 무작정 기다려본 경험이었다. 분명히 내가 잘못한 날이었을 거다. 이러다 눈사람이 될지도 몰라 구시렁대면서도 골목길 희부연 가로등 아래서 꽤 오래 기다렸다. 등을 돌리는 순간 그가 지나칠 것 같아 꼼짝도 안 했다. 미안함이 야속함으로 변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그 사람의 실루엣이 비칠 때 얼마나 반갑던지. 영원의 순간으로 느껴졌다. 핸드폰이 손에 들어오고 그 기다림의 맛을 느끼기 어려워졌다. 무엇보다 더 이상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지 못한다. 바보 같은 일 혹은 민폐로 여겨질 것 같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는 한 달에 3천 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소녀의 이야기가 나온다. 깨어있는 동안 10분 단위로 문자를 보낸 거다. 그 아이는 누구에게 그렇게 타전을 친 걸까. 아주많다는 것은 아무도 없는 것과 같다. 고독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바우만은 '각자 자신의 보호막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면서,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여 만들어내는 이 관계에선 하기 싫은 건 안 해도 되고, 누군가가 자신을 불러도 없는 척 무시할 수 있고, 당장 연락을 끊고 싶다면 차단을 이용해 성가신 친구로부터 벗어날 수있다고 말한다.


정말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무시할 수 있을까. 아닌 것 같다. 대면 만남과 달리 온라인을 통한 연결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만큼 온라인이 족쇄가 되기도 한다. 내가 보낸 문자를 상대방이 읽었는지를 알 수 있는 이 구조는 사람을 안달 나게 한다. 젊은 세대들은 새벽에도 필요하면 문자를 보낸다. ‘밤늦게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하는 양해의 말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편리함 이면에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있기 마련이다. 가장 크게 치러야 하는 비용은 충분하면서도 진실하게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것.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그 길에서 고독을 누릴 기회를 놓쳐버린다.      




오늘도 나는 누군가에게 오는 문자메시지가 녹슬기 전에 웬만하면 답을 하고 있다. 안읽씹보다는 읽씹을 더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존중하고, 무엇보다 당신을 존중합니다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이다. 그래도 가끔은 핸드폰 알람을 끄고 멍을 때리며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을 즐길 것이다. 그 시간만은 오롯이 나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그 시간만은 온전히 당신에게 깊이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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