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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정 Dec 15. 2022

존재의 테이블

이사를 하고 남편이 6인용 식탁을 사주었다. 넓은 책상에서 맘껏 글을 쓰라는 뜻이었다. 내게 정말 필요한 건 책상이 아니야. 자기만의 방과 생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매년 500파운드의 돈도 필요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버지니아 울프 시대의 500파운드는 요즘 화폐 가치로는 연 4000만 원 정도라고 한다. 결국 경제적 자립을 말하는 것이겠지. 대답은 충분히 예상된다. 그래 조금 쉬면서 자유로운 시간을 가져봐, 그동안 벌어둔 돈으로 글 쓰면서 살면 되잖아. 나는 빙그레 웃고 말 것이다. 아 벌어둔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자영업자의 삶은 맑은 날 모아서 흐린 날을 감당하는 무한 반복임을 월급생활자들은 모르는 것 같다. 그들도 마찬가지려나. 8시간 매일의 성실한 노동으로는 한국 사회에서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선배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돈이 돈을 벌게 해야 한다나....      


문득 나희덕의 수필 ‘존재의 테이블’이 떠올랐다. 작가가 인도 여행 중에 구입한 앉은뱅이 탁자에 관한 상념을 담은 글이다. 그 탁자는 노트 한 권 올려놓으면 꽉 차는 아주 작은 사이즈다. 작가는 이 테이블을 살 때 바슐라르가 쓰던 ‘존재의 테이블’을 떠올렸다고 한다. 바슐라르는 추운 겨울날 불기 하나 없는 방에서 추위에 떨며 책을 읽었다. 그는 자신의 앉은뱅이 탁자를 작업용 테이블이라 부르지 않고 존재의 테이블이라고 불렀다. 그 테이블에 앉는 순간만큼은 즐거운 독서와 몽상을 통해 자기 존재와 세계에 대해 깊은 행복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약간의 시간만 나면 식탁에 앉아 시간을 보내려 한다. 집에까지 끌고 들어온 밀린 일을 할 때가 대부분이고, 책을 읽거나 무언가를 끄적일 때도 있다. 그러나 마음만큼 그 존재의 테이블에 앉을 여유를 챙기기 쉽지 않다. 일주일 중 하루도 자유롭지 못한 생계 노동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감당해야 할 일은 많다. 아버지가 아프실 때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아버지 병간호하느라, 시아버지 아프실 때는 또 그 일로 분주하였다. 누구라도 아프면 마음이 그곳으로 쏠린다. 천성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혼자 지내는 어머니를 걱정하거나, 산책을 하지 않으면 시무룩해지는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일도 있다.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글 쓰는 일을 최우선에 두겠다고 마음 먹었다. 내 꿈을 위해 다른 핑계를 대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장담을 했건만 잉크도 마르기 전에 나는 여기저기 정신없이 다니느라 테이블에 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바깥으로만 돌아다니다 보니 어떤 날은 집이 낯설게 느껴져 현관문에 한참 서 있었다.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바쁘면 바쁜 대로, 고통스러우면 지루한 고통에 빠져서, 그보다 더 자주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값싼 인생무상에 빠져 그 앞에 앉지 못한다. 존재의 자리는 쉬이 생기지 않았다. 세상 뭐 별거 있겠어 인생무상의 논리에는 애를 써도 잘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과 자신 없음이 도사린다. 잘하지 못할 바에야 안 하는 게 낫다는 방어기제도 작용하는 듯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린다. 나는 그녀가 오래 고통받은 불행한 가족사와 분열증 때문에 우즈 강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녀의 문학적 자취를 따라가며 시대라는 벽에 부딪혀 그녀가 할 수 있는 그 모든 시도를 다한 끝에 마지막 도달한 종착지가 죽음임을 느꼈다. 첫 소설 제목이 출항인 것은 시사적이다. 그녀는'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한 세기쯤을 더 산다면 그리하여 연간 500파운드와 자신만의 방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습관과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가 공동거실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인간을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와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면, (중략) 그때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결국 내게 부족한 것은 자유를 누리는 습관과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싶다. 그 시간만은 온전하게 나를 대면하고 세상을 향해 정직한 발걸음을 내딛는 시간일 것이다. 오랜만에 나는 6인용 식탁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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